2020. 7. 5. 15:45ㆍ同僚愛/안희연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랄 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 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안에서 시계가 사라진 줄도 몰랐다
서둘러 다음 장을 펼쳐보았다 "침묵은 부리 잘린 새처럼 사방에서 회오리쳤다." 부리 잘린 새를 상상하는 건 손목이 시큰거리는 일이었고 벽에는 전에 없던 붉은 얼룩이 생겨 있다
어쩌면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잇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고 참 이상한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큰 비가 내렸다"라는 문장을 만났을 땐 이미 발이 물속에 잠긴 뒤였다
"건너왔어."
그렇게 끝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트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전등을 들고 천천히 사방을 살피며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안희연,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현대문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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