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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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누드비치」
누드비치라는 말은 기분이 좋다 먼 나라 사람 이름 같다 귀르비치 말코비치 이바노비치 나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달리는 말 위의 소나기 같고 골목 끝 신혼집에서 불어오는 콧노래 같고 그곳에선 밤이면 까르르 한 쌍의 깃털베개도 날아다닌다 말을 달려도 말을 멈춰도 소나기는 내린다 베개 솔기가 터지도록 찢어지게 웃다가 찢어지는 연인과 찢어지게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과 찢어지게 낡아서 찢어지는 책들과 속수무책이 쌓여서 읽을 수 없는 날이 오고 창 밖의 창 밖의 창 밖의 별을 더듬으며 과거를 알고 싶어요? 나체로 말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질까 그런데 왜 양말은 신고 있죠? 그것이 이름표라는 듯이 아직 벗을 게 더 남았다는 듯이 국경을 벗으면 세계는 하나라는 듯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얼기설..
2021.06.06 -
이민하 「가위」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 위층의 아이들은 어둠을 모르고 군악대처럼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 이놈의 쥐새끼들 같으니! 막대기로 두드려봤자 천장이 문도 아닌데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을 텐..
2021.06.06 -
김향지 「기침」
1 앉아 무릎을 감싸면 팔 안쪽에서 웃자라던 차가운 언어들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삼켜야 하는 기침처럼 서둘러 지운 다짐들을 혼자 손끝으로 몰래 닦아보면 따뜻한 비가 우리의 온도와 맞는다는 인사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고 사람들이 실은 아름다운 것을 늘 사랑했다는 기침 같은 고백일 수 있겠다 단지 어느 너머에 발 디딘 날 2 가장 기분좋은 표정을 짓고 누가 봤을까봐 세계를 기웃 보며 서둘러 기분을 잃어버렸다고 미안하다고 한 번쯤 말해줘야 할 내가 많은 꿈에 있다 그늘에서 마르지 못한 기분이 기침으로 나왔다고 고백해도 좋다면 그런 낮에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웃는 아이의 얼굴이 신 같았다 김향지, 얼굴이 얼굴을 켜는 음악, 문학동네, 2021
2021.06.06 -
이장욱 「일관된 생애」
태어난 뒤에 일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눈코입의 위치라든가 뒤통수의 방향 같은 것인가 또는 너를 기다리는 표정 나는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같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였다. 갑자기 슬픔에 빠졌다. 변성기는 지났습니다만 저는 살인자이며 동시에 이웃들에게 아주 예의바르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회의 덕목, 정중하게 넥타이를 매고 예식에 참석했다가 취한 뒤에는 술잔을 던지고 가로수가 언제나 거기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길고양이가 지나다니는 골목의 밤을 깊이 이해하였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매우 일관되었다고 오늘도 변함없이 죽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워집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재자와 신비주의가 싫었어요. 제게도 미친 듯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2021.05.15 -
이혜미 「손차양 아래」
만들어낸 그늘 밑 잠기는 볕 말려드는 이마와 말들이 겹치는 잠시의 잎사귀 속 죽은 자의 이마에 얹히는 부드러운 흙 같은 그런 색은 불안해 캄캄한 피들을 이어붙여 손 안쪽에 넣어두다니 낯설어진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가에 드리워진 얼룩이 얼굴로 달라붙는데 부러 지어먹은 마음이 절벽을 만들 때 여름을 끌고 오는 손짓들이 미리 당겨 무덤을 쓰나 빛으로 뭉쳐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반만 남은 입술을 바라본다 너의 화환이자 나의 죽은 꽃을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202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