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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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홍콩 정원」
끊긴 꿈으로부터 재생되는 살점 * 날개를 가지런히 접어놓고 결정하지 못했지 육교보단 모텔이 모텔보단 강물이 낫겠지 거기 예술가 너를 뭐라 불러야 하지? 장화 속 거머리들, 대형 비닐 봉지, 라벤더 비누 중력을 두려워 마 시간과 속도의 문제일 뿐이야 음악이 잊게 해줄 거야 * 네가 피어난 자리 나는 약간 휘청거렸다 살을 만져봤다 분장을 하고 객실에 얌전히 있었는데 따듯한 나라로 이동 중이었는데 진통제, 염주, 플랫슈즈, 기차표, 미술관 입장권 나를 찾는 데 도움이 될까요? 살아버렸습니다 빠르게 다 살아버렸어요 해부하고 마시는 것은 나의 취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한 날이 있어요 * 옷깃을 잡거나 사과를 떨어뜨려도 나는 알 수가 없는데 이슈가 필요한데..
2021.04.26 -
정우신 「베이스캠프」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염소 발목을 부러트려 십자가를 만들었다 우리는 눈보라의 어디쯤을 짚어보고 있을까 난로 위에서는 물이 끓고 나는 네가 기타 가방에 그려놓은 동물이 오길 기다렸다 뿔과 날개가 있고 다리가 없는 그 동물, 우리의 얼굴이 반반 섞여 있는 그 동물 내가 위태로울 때면 너는 따듯한 술잔을 들고 꿈에 나타났다 우리는 머나먼 바다까지 흘러가기도 하고 사냥당한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별을 바라보곤 했다 침낭 지퍼를 머리끝까지 잠그고 죽음의 두께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먼저 갔듯이 눈발은 발자국을 오래 남기지 않는다 기도를 하다가 멈추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정우신,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2021.04.26 -
조해주 「기일」
가끔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불 꺼진 쇼윈도 속에서 나는 조금 놀란 표정 점집에서 십만 원 주고 결혼 날짜를 받아온 사람이나 금요일 새벽 천국에 대해 무서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목사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 자연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일처럼 유일하고 소형 비행기처럼 삐뚤빼뚤한 내가 수없이 비상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과 그 모든 것을 몰랐다는 듯 우연으로 꾸미려는 계획 또한 죽는 것도 실수할까 봐 걱정된다 오직 자연스러운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부자연스럽지만은 않고 나는 결코 인간다운 걸음걸이로 걷지 않으며 하얗고 길게 펼쳐진 계단의 끝이 팡파레와 천사들의 노래는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지 귀퉁이를 하나씩 찢었다 새가 없는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깃털이 육교 위로 흩날렸..
2021.04.16 -
조해주 「다큐멘터리」
나는 달의 입체성을 믿지 않는다. 그것에게 옆모습이 있다고? 원숭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유리 너머의 원숭이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바나나 껍질을 던진다. 원숭이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붉은 얼굴과 긴 코트를 입고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이 겹쳐 있다. 어쩌면 원숭이는 나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악몽 같은 형상을 향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원숭이에게 우리이고 내게는 화면인 것. 그것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유리는 너무 차가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유리와 닿은 부분 말고는 모두 지워지는 기분이다. 원숭이의 공격성이 유리를 깨부술 수는 없을까. 원숭이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바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거나 등지고 앉지..
2021.04.16 -
조해주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은 지루하다고 말하는 영화를 나는 좋아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먼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는 사람은 등 뒤에서 갑자기 나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은 갑자기 해변이 되기도 하고 나는 아아, 하고 길게 아주 길게 눈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주 선다 점심을 먹는 장면 속의 식당 주인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그 사람은 나의 선생님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음악이었을까 아니면 국어였을까 닮은 사람이라는 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야 영화 속에서 나는 유창한 스페인어로 음식을 주문하면서 비로소 돌아왔어요,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걸로 되겠니?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은 잘 웃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은 조금씩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나는 좀처럼 영화에..
2021.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