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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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모잠비크 드릴」
몸속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다 그것들은 애완 먼지였으므로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 줘야 했다 그것들은 서로 너무 닮았고 작았다 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거짓과 진실을 섞어 진실한 거짓말을 만들었다 천사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고 있다 그림자가 있겠지 그래 독실한 신성모독자인 그는 매 순간 신을 욕보였지만 기록에 남는 불경이 필요해서 문장을 지었다 신이 잠들었을 때 그의 안구가 보고 있던 것은 우주 속을 떠도는 찻주전자 하나 아름다운 일인용 지옥 신 없다,가 있다 있다,가 없다 평범한 일은 이상하다 이상한 일이 평범하다 믿음은 참 안온하지 신이 있다면 신이 없다면 신을 믿는 사람이 주는 마음은 꼭 잔반 같았는데 그는 싫어하지 않았다 시 같은 걸 쓴다고 믿는 김건영은 잔반을 받아먹고도 살이 ..
2021.03.15 -
주하림 「오로라 털모자」
내 기억은 온전치 못한 것이기에 편지를 써두어요 겨울을 보냈어요 드레스를 입은 환자가 들판을 달려 엊그제 오해 때문에 떠나보냈던 남자 뒤를 쫓기 위해 고무오리인형을 타고 암흑뿐인 호수를 건너 조금씩 더 슬퍼져 가는 정신병자처럼 입가에 사탕부스러기를 붙이고 그것들이 떨어질 때까지 겨울 떡갈나무에도 입술이 생기길 바랐어요 잘생긴 귀가 보이는 기다랗고 멋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얼어붙은 땅 따위 걷어차고 침대 속에 오래 묻어 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글과 익은 열매와 멍든 과일주 와 한 가지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거기에 흩어진 주근깨 같은 당신을 보았어요 피부를 뚫고 나온 흙투성이 발톱 쐐기풀 망태기를 뒤집어쓰고 죽음과 나누던 이야기를 창밖으로 다른 나라 말로 비명을 지르는 눈사람 북유럽 동화를 읽어 ..
2021.02.24 -
주하림 「언덕 없는 이별」
우리는 도서관 통로에서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어떤 영혼이 지나온 길고 무거운 한숨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의 스위스 화가 그림이 걸려 있다 키스를 나눈 도서관 창문으로 벚나무 가지들이 들어왔고 마침 깨어난 개구리가 아무도 없는 밤의 연못을 헤맨다 우리는 그때까지 어떤 것으로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때 조용한 가축들의 울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의 마른 등 뒤로 십일 번 트랙을 들려주었고 너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연주자의 긴 이름을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때 시간은 구소련 음악가들의 무대처럼 춥고 넘쳤지만 세상의 이목을 피해 천사가 연주하던 곡은 실은 신의 조롱으로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대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나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화면 속에 너는 흑백으로 죽어간다 우리는 침묵을 깨는 입맞춤* 사라..
2021.02.24 -
하재연 「행성의 고리」
나의 삶 이전에 결정된 내 인생의 장면들 묵음으로 지나가는 느린 유리 속 뒷모습 비어 있는 이름 몇 개 너의 정면을 보지 못하는 나의 흰 눈동자 우리는 어디선가 이어져 있겠지 찌그러진 타원형의 바깥들에 매달려 계속해서 바깥이 되어가고 있겠지 검은 우주처럼 끝없이 돌면서 팽창하면서 하재연, 우주적인 안녕, 문학과지성사, 2019
2021.02.22 -
김승일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
나는 무서운 것이 너무 많고 비위도 약하지만 내가 시체 청소부면 좋겠다 초등학교 앞에 시체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떼로 몰려서 시체를 둘러싸고 서서 그걸 보고 있다 한마디씩 하는 애들도 있고 아닌 애들도 있지 애들도 시체를 봐야 시체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만 나는 시체가 너무 불쌍해서 시체를 들고 먼 곳으로 간다 아무도 보고 수군거리거나 침묵하지 않도록 그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고 시체는 대부분 축축하고 무겁다 나는 내가 애면 좋겠다 천만 명이면 좋겠다 어린애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 항상 있는 시체가 나타나면 들고 먼 곳으로 가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놓치고 공항에 오랫동안 갇혀서 이런 개고생 좀 그만하려고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해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집에만 있으려고 했던 것..
2021.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