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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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저녁의 대관람차」
이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한 사람의 눈동자를 완성할 수 있을까 야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도시의 불빛을 보러 온 것인지 도시가 어둠에 잠긴 풍경을 보러 온 것인지 자물쇠가 반짝였고 비밀이 풀리는 순간을 함께한다면 어떤 기억은 떠오르다가 투명한 바늘에 찔린 것처럼 순식간에 터진다 층계를 밟는다 미끄러운 바닥조차 없는 빛을 잡을 수도 없는 공중은 평평하고 약간 따뜻하다 아직 바다도 꼭대기는 아니다 스스로를 가두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 도달하려는 노력 없이 그런 기분만을 가지면 된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도 놀이터에서 비눗방울을 만드는 아이들이 보인다 머리카락에 벚꽃 잎이 붙은 줄도 모르고 비눗방울 속에 들어 있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폴짝 뛰어오르다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기..
2021.02.10 -
이기리 「궐련」
머리는 바닥에 빠르게 떨어지기 위해 가장 무겁게 만들어진다 입술 자국이 묻은 문장은 금세 재가 되어 가라앉는다 그릇이 다 채워져 뚜껑을 덮어 버리면 아직이라는 부사를 자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일 것이다 볼링공이 무표정으로 레인을 구르다가 핀을 쓰러뜨린다 아홉 핀이 뒤로 넘어가고 남은 한 개의 핀을 향해 구르는 공 스페어 실패 스핀도 없이 도랑으로 빠지지 다 같이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 숨을 나눠 마시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뒤섞인 냄새가 온몸을 더듬는다 테이블에 칸막이를 설치한 식당에 앉아 얼굴을 묻고 국수를 들이켠다 밥을 먹을 때 숙이는 등의 기울기를 따라 그림자도 휘어진다 두 갑 정도 태우면 채울 수 있을 형상이다 썩어 문드러졌을 속이지만 같은 색깔은 같은 색깔로 지울 수 있다..
2021.02.10 -
이기리 「코러스」
너는 점심시간만 되면 식당에 가는 대신 빈 교실에 남아 도시락을 먹었고 나처럼 매일같이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갔다 그리고 너는 내가 걸어 둔 외투에 항상 자신의 외투를 겹처 걸어 두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너는 엽서만 한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에 눈송이처럼 떨어져 녹아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읽던 책을 잠시 시옷자로 덮어 두고 옷을 챙기고 나가 운동장 주변을 좀 걷다 들어올까 싶다가도 나의 외투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너의 외투를 바라보고 나면 그 자리에서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전화를 받으려고 황급히 나가는 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두고 간 수첩을 집어 들었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수선스러웠던 복..
2021.02.10 -
신달자 「겨울 그 밤마다」
물이 끓고 있다 어느 젊음이 조금씩 줄어들며 끓고 있었다 난로가에는 물수건 하나가 물기를 가시며 말라가고 누구의 넋인가 하얀 김이 천장을 향해 나르고 있다 사라져 어둠이 되는 한 방울 물의 흔적이 내 가슴 중심에 맺혀 끓어오른다 속도를 좁히며 끓는 물소리 초조로이 멀어져 가는 소리를 이어 받으며 물이 졸아든다 달아오른 빈 주전자에 찬물을 따르는 겨울밤 겨울밤 양팔을 벌리며 머리 위부터 찬물을 끼얹는 나의 젊음아 밤마다 밤마다 잠 속으로 이끌고 들어 가는 미완의 고백 미완의 용서 그런 것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베개 모서리 어디쯤서 끓고 있다 끓고 있다 나의 젊음이 조금씩 줄어 들며 끓고 있었다. 신달자, 백치슬픔, 자유문학사, 1989
2021.02.03 -
김혜순 「박쥐」
우리의 침대는 서로 다른 대륙에 놓여 있어서 내가 잠들 때 너는 일어나고 내가 일어날 때 너는 잠들지 어제 내가 보낸 두 손을 받아보았니? 네 아침의 대륙으로 보낸 나의 밤 선물 네 침대 밖으로 네 손이 툭 떨어지고 네 손을 서랍처럼 잡아끌던 뜨거운 열 손가락 너 놀라지는 않았니? 그런데 네가 그 손목을 잘라버린 건 아니니? 아, 지금은 없는 두 손목이 나는 거기서 아파 멀리 수평선 위로 핏방울 하나 떠오르면 희디흰 이불 홑청 위로 붉은 물이 아프게 아롱지고 입안에 도는 피 냄새 내가 또 그 피거품 속에서 없는 두 손목을 들어 하루 종일 편지를 쓸 시간이야 내 뜨거운 검은 주먹이 네 천장에 매달려 피를 말리고 있나 봐 너는 알고 있니, 내가 그 검은 피를 찍어 네게 이 편지를 쓴다는 거 우리의..
202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