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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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커트 피스」
흐린 날씨다 철교를 따라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연이은 불행 찢기고 찢긴 삶은 고통이었지만 예술은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이야기 용기로 삼고 싶지 않다 등에 한가득 짐을 진 사람이 저 앞을 걸어간다 오늘처럼 바람이 부는 날 뉴욕에서 쿠사마 야요이는 반품된 커다란 작품을 들고 40블록을 걸었다 어디서 네 작품을 볼 수 있니? 오랜만에 만난 이가 전하는 다정한 안부 시집은 구천원, 원한다면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도 있어 관람료는 없고 공짜야 말하고 길을 나서는 나보다 앞서간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가 계속해서 가고 있다는 믿음이 천천히 머리칼을 적신다 안개처럼 도시를 산책하던 아..
2021.11.07 -
정다연 「에코백」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커피향이 고소하다 불에 볶은 과테말라, 케냐, 오악사카산 원두 수익의 일부는 정당하게 현지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돌아간다 많이 살수록 할인율은 높아진다 최저가의 최저가 에코백은 덤이다 담배 있어요? 역 광장을 돌며 담배를 구걸하던 남자가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 그러나 너무도 쉽게 눈에 띄는 한국이 싫다며 외국을 전전하던 친구는 이제 세상에서 서울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한다 돈만 있다면 이렇게 편한 나라가 어딨어? 멕시코시티에서 총에 맞아 죽은 아이를 봤어 모르몬교 백인을 향한 증오범죄였는데 해변에서 먹었던 토르티야는 정말 매웠지 실컷 떠들다가 친구는 기념품으로 샀다는 핸드메이드 에코백을 건넨다 착한 소비는 가난한 ..
2021.11.07 -
박세랑 「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 놓았니」
응급실에서 눈을 뜬 아침, 절망이 동공을 힘껏 긋고 지나가는데 등이 구부정한 아버지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다 얘야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니 병실 침대 맡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흐릿하게 묻고 있다 아버지 달이 자꾸만 커지는 게 무서워서요 새벽녘에 커다란 보름달이 목을 졸라댔거든요 자세히 보니 달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내 과거의 눈동자였어요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동공이 깨질 듯이 쓰라려서요 싸늘하게 겪은 일과 시퍼렇게 당한 일 사이에 걸터앉아서 손목을 사각사각 깎아냈을 뿐인걸요 연필 가루처럼 후두둑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통통한 벌레로 변하더니 바닥을 기어 다니던데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나는 또박또박 상처..
2021.09.05 -
강보원 「현실적인 잠」
당신의 잠이 내게로 왔다 물웅덩이가 없는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서 이유를 몰라서 괜찮은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당신의 잠은 치와와처럼 짖는 밤으로부터 멀어지려고 꿈을 다 썼다 풀 냄새를 맡으러 간다고 쓰인 쪽지가 있다 당신은 차가운 물을 단숨에 마시지 못한다 당신은 마카롱을 오래 물고 있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 그게 아무래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철새들이 방향을 바꾸고 하늘이 빈다 그 밑에서 나는 항상 더 밑으로 가려는 습성이 있다 지하실에선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린다 작은 동물이 더 재빠르고 무서워진다 당신의 잠은 자꾸 내게로 온다 당신이 당신의 잠 앞에서 머뭇거리기 때문에 당신이 혼자 글을 쓰고 그것을 혼자 읽기 때문에 나는 소스라치고 그 소스라침을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2021.09.03 -
강보원 「저택 관리인」
마루야, 하고 나는 마루를 불렀는데 방 안에 있던 푸들들이 다 우르르 달려오는 거야 백 한 마리나 되는 이 푸들들의 이름을 다 마루라고 한다면 겹치는 걸까? 겹치면 더 좋겠지…… 나는 구분 가지 않는 것들을 사랑해 그 불가능성이 그 푸들들을 전부 다 사랑하게 만들었지 어쩔 수가 없어서 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렇게 나는 푸들들에 둘러싸여서 산더미 같은 개밥 포대를 뒤적거리며 살고 있어 하지만 가끔은 나는 몸이 하나인데 푸들들은 너무 많다, 너무…… 너무 깜짝 놀라서 울고 싶어지는 거야 이렇게 멍멍 멍멍, 하고 강보원,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민음사, 2021
2021.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