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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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white bush」
죽은 듯이 잠자고 깨어난 아침 나는 차가운 연기 속수무책 영토를 넓히는 얼룩들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를 보았다 계단에서 마당에서 처음 보는 현관 앞에서 기도하고 체조하며 어지럽게 얼어붙은 첫 공기와 서성이던 나는 나를 감싸고 보호하던 기름진 빛이 늦은 창피 한 겹이 사라졌구나 나 오늘부터 내가 살아보지 못한 몸으로 살게 됐구나 지대가 높은 구조가 아름다운 이 저택에서 낙엽들로 부산스럽던 지붕 아래서 우기다 눈물 흘리다 갑작스레 쫓겨날 때까지 지친 뿌리 마당 곳곳 파고드는 몸집으로 잠들기까지 긴긴 세월 대저택을 사랑하던 자 벽과 가벽 사이에서 허둥대던 자를 위한 새 이파리 새 현실이 주어졌구나 생활기도도 체조도 잘 되는구나 깨달았는데 우기던 계단과 창백하게 변색된 이파리 어제까지 오르내리던..
2021.08.19 -
김연덕 「사월 비」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래도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2021.08.19 -
김연덕 「라틴크로스」
줄지어 선 유리잔.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불빛과 짧은 보상처럼 아름다운 중국식 소켓을 본다. 참는 손님도 참아주는 손님도 없는 이곳은 돌발 행동 직전의 소켓에게만 허락되는 삶. 적의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무엇을 삼켜 내듯 환하게 멈추고 흔들리는 방. 몇 시에 닫아요? 주인에게 묻지만 대답 대신 위험한 액체로 소독된 유리잔이 두 개 세 개 서 있다. 천장보다 높은 선반을 상상하는 자세로 깨끗하게 비어 있다. 나는 잘 참는 사람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의지 고전적인 열성으로 어제까지 참았는데 끝까지는 못 참아 이상하고 슬프게 화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서없이 찢겨진 중국 책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어린 소수의 외국 사람 순정한 마음을 돌려받지 못했다. 완전히 잃지도 못했다. 어째서 오래..
2021.08.19 -
이민하 「비어 있는 사람」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 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
2021.07.29 -
강재남 「나는 좀 슬픈가 봐, 갈대가 머리칼 푼 모습만 눈에 들어와」
정량천을 걷는다 내 걸음은 가난한 곳으로 흐르고 줄지어선 갈대가 무심한 표정으로 천변에 널려있다 나도 갈대가 되어 천변 어느 곳에 주저앉아버릴까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바람 부는 곳으로 따라 흔들리게 될까 이생에서 잠시 머물다 갈 일을 잊고 하루를 하루 같이 여기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세상 소용없는 것이 손에 잡히는 것이란 걸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꼭 잡아야 하는 것을 또 생각하는 것인데 부질없는 것들과 집착하는 것들을 눌러 앉히는 저녁 밟는 곳마다 땅이 질퍽이는데 천변을 따라가면 내 아이 머무는 너른 풀밭이 나올 테고 갈대를 머리에 꽂은 아이가 이쪽을 보고 있을 테고 저 혼자 가을이 되고 있을 아이가 못내 서러워 수첩에 적힌 지도를 펼친다 그곳은 아직 내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 스산한 바람이 계절의 행방..
2021.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