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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원 「현실적인 잠」
당신의 잠이 내게로 왔다 물웅덩이가 없는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서 이유를 몰라서 괜찮은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당신의 잠은 치와와처럼 짖는 밤으로부터 멀어지려고 꿈을 다 썼다 풀 냄새를 맡으러 간다고 쓰인 쪽지가 있다 당신은 차가운 물을 단숨에 마시지 못한다 당신은 마카롱을 오래 물고 있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만하고 싶다 그게 아무래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철새들이 방향을 바꾸고 하늘이 빈다 그 밑에서 나는 항상 더 밑으로 가려는 습성이 있다 지하실에선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린다 작은 동물이 더 재빠르고 무서워진다 당신의 잠은 자꾸 내게로 온다 당신이 당신의 잠 앞에서 머뭇거리기 때문에 당신이 혼자 글을 쓰고 그것을 혼자 읽기 때문에 나는 소스라치고 그 소스라침을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2021.09.03 -
강보원 「저택 관리인」
마루야, 하고 나는 마루를 불렀는데 방 안에 있던 푸들들이 다 우르르 달려오는 거야 백 한 마리나 되는 이 푸들들의 이름을 다 마루라고 한다면 겹치는 걸까? 겹치면 더 좋겠지…… 나는 구분 가지 않는 것들을 사랑해 그 불가능성이 그 푸들들을 전부 다 사랑하게 만들었지 어쩔 수가 없어서 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렇게 나는 푸들들에 둘러싸여서 산더미 같은 개밥 포대를 뒤적거리며 살고 있어 하지만 가끔은 나는 몸이 하나인데 푸들들은 너무 많다, 너무…… 너무 깜짝 놀라서 울고 싶어지는 거야 이렇게 멍멍 멍멍, 하고 강보원,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민음사, 2021
2021.09.03 -
김연덕 「white bush」
죽은 듯이 잠자고 깨어난 아침 나는 차가운 연기 속수무책 영토를 넓히는 얼룩들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를 보았다 계단에서 마당에서 처음 보는 현관 앞에서 기도하고 체조하며 어지럽게 얼어붙은 첫 공기와 서성이던 나는 나를 감싸고 보호하던 기름진 빛이 늦은 창피 한 겹이 사라졌구나 나 오늘부터 내가 살아보지 못한 몸으로 살게 됐구나 지대가 높은 구조가 아름다운 이 저택에서 낙엽들로 부산스럽던 지붕 아래서 우기다 눈물 흘리다 갑작스레 쫓겨날 때까지 지친 뿌리 마당 곳곳 파고드는 몸집으로 잠들기까지 긴긴 세월 대저택을 사랑하던 자 벽과 가벽 사이에서 허둥대던 자를 위한 새 이파리 새 현실이 주어졌구나 생활기도도 체조도 잘 되는구나 깨달았는데 우기던 계단과 창백하게 변색된 이파리 어제까지 오르내리던..
2021.08.19 -
김연덕 「사월 비」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래도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2021.08.19 -
김연덕 「라틴크로스」
줄지어 선 유리잔.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불빛과 짧은 보상처럼 아름다운 중국식 소켓을 본다. 참는 손님도 참아주는 손님도 없는 이곳은 돌발 행동 직전의 소켓에게만 허락되는 삶. 적의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무엇을 삼켜 내듯 환하게 멈추고 흔들리는 방. 몇 시에 닫아요? 주인에게 묻지만 대답 대신 위험한 액체로 소독된 유리잔이 두 개 세 개 서 있다. 천장보다 높은 선반을 상상하는 자세로 깨끗하게 비어 있다. 나는 잘 참는 사람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의지 고전적인 열성으로 어제까지 참았는데 끝까지는 못 참아 이상하고 슬프게 화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서없이 찢겨진 중국 책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어린 소수의 외국 사람 순정한 마음을 돌려받지 못했다. 완전히 잃지도 못했다. 어째서 오래..
2021.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