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기형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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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 성탄목 ― 겨울 판화 3
기형도 / 성탄목 ― 겨울 판화 3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름답다 그것뿐이다 오늘은 왜 자꾸만 기침이 날까 내 몸은 얼음으로 꽉 찬 모양이야 방 안이 너무 어두워 한 달 내내 숲에 눈이 퍼부었던 저 달력은 어찌나 참을성이 많았던지 바로 뒤의 바람벽을 자꾸 잊곤 했어 성냥불을 긋지 않으려 했는데 정말이야, 난 참으려 애썼어 어느새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었네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 그 옆에 은박지 같은 예배당이 있었지 틀린 기억이어도 좋아 멀고먼 길 한가운데 알아? 얼음 가루 꽉 찬 바다야 이 작은 성냥불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 어머니는 나보고 소다 가루를 좀 먹으라셔 어디선가 통통 기타 소리가 들려 방금 문을 연 촛불 가게에 사람들이 몰려..
2020.12.27 -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
2020.12.27 -
기형도 / 대학시절
기형도 /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변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 대학 시절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