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허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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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 그해 여름
허연 / 그해 여름 # 1 미국 드라마는 병실에서 섹스를 했다. 여배우는 꼭 창틀에서 한쪽 다리를 든다. 일종의 백기인 셈이다 # 2 한 달 내내 내리는 비에게 예를 갖춘다. 바다는 늘 익사한 자들만 받아들인다. 익사한 자들은 지느러미를 얻었다 # 3 부고가 도착했다. 따로 태어나서 따로 죽는다. 예도는 거짓이다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은 죽지 않은 자다. 죽음을 모르는 자다 # 4 철조망 앞에서 울고 있는 할머니에게 시절은 형벌이다. 강한 자만이 세월을 견디는 게 아니라 한 맺힌 자들도 시절을 견딘다 # 5 열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가 예뻤고 나는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는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그날 밤 파이닝거의 돛단배를 타고 북회귀선으로 가는 꿈을 꿨다 # 6 세월은 ..
2020.12.31 -
허연 / Cold Case 2
허연 / Cold Case 2(19세기 사람 쥘 베른이 쓴 「20세기 파리」라는 소설에 보면 시인이 된 주인공에게 친척들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안에 시인이 나오다니 수치다.")20세기도 훨씬 더 지난 지금 시는 수치가 된 걸까.시는 수치일까. 노인들이 명함에 박는 계급 같은 걸까. 빵모자를 쓰는 걸까. 지하철에 내걸리는 걸까.시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랑 더 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다. 시 쓸 영혼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본다.싸구려 호루라기처럼 세상에 참견할 필요가 있을까. 노래를 해서 수치스러워질 필요가 있을까? 자꾸만 민망하다.그런데도 왜 난 스스로 수치스러워지는 걸까. 시를 쓰는 오후다.불머리를 앓고도 다시 불장난을 하는 아이처럼빨갛게 달아오른 쇠꼬챙이를 집어 든다. ..
2020.12.31 -
허연 / FILM 2
허연 / FILM 2 신은 추억을 선물했고 우리는 근본이 불분명한 젤리를 씹으며 참 많은 것을 용서했다 가끔씩 어떤 끔찍함이 탄환처럼 빠르게 삶을 관통하고 지나갔지만 뜨거움은 그때뿐이었다 탄환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태생적인 방관자들이 부러웠고 느티나무의 실어증이 부러웠다 그날그날의 슬픈 방을 찾아들어가며 우리는 울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수만 년 전 조상들이 이러했을까 그들도 눈을 맞으며 울었을까 아무것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밤새 울었다 따뜻한 오줌을 누며 방점을 찍듯 깜빡이는 가로등에 기대 느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십만 년 동안 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밤새 눈은 연옥을 덮고 있었다 허연 / FILM 2 (허연,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20..
2020.12.31 -
허연 / 시월
허연 / 시월 혼자 했던 전쟁에서 늘 패하고 있었다. 그걸 시월에 알았다. 잊을 테니까 아프지 말라고 너는 어두운 산처럼 말했다. 다시는 육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시는 길게 앓지도 않겠다고 너는 낡은 트럭에 올라타면서 웃었다. 매미들의 잔해가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세 대나 놓치며 정류장에 서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자동차의 불빛들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기를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세상의 모든 느낌이 둔탁해졌다. 입맞춤도 사죄도 없는 길을 걸었다. 동네에서 가장 싼 김밥을 팔던 가게 앞을 지나면서 다가올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방금 운 듯한 하늘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디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
2020.06.23 -
허연 / 삽화
허연 / 삽화 알약들처럼 빗방울이 성긴 저녁. 용케 젖지 않은 자들의 안도 속에 하루가 접히고 있었다. 퇴근 무렵. 아버지가 당신의 결혼사진을 들고 찾아왔다. 자꾸 빛이 바랜다며 어떻게 할 수 없겠냐고 비닐봉지에 싸온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어머니의 드레스는 이제 완벽한 황토색이다. 친일파와 빨갱이 집안의 결합. 하객보다 기관원이 더 많았다는 집안 내력을 생각하며, 곁눈질로 사진을 보며, 나는 꼬리곰탕을 후후 불었다. 속으론 "살아 계실 때 잘 좀 하시지"라고 투덜댔지만, 반주까지 걸친 다혈질의 아버지에게 그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비는 다음 날에도 계속됐고, 나는 비닐에 싸인 빛바랜 사진을 옆구리에 끼고 충무로 골목길을 헤맸다. 오늘도 뭔가 포기하지 않는 새들만 비를..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