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김희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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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김희준 / 머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 나는 반인족 안데르센의 공간에서 태어난 거지 오빠는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잠그면 매일 같은 책을 집었다 모서리가 닳아 꼭 소가 새끼를 핥은 모양이었다 동화가 백지라는 걸 알았을 땐 목소리를 외운 뒤였다 내 머리칼을 혀로 넘겨주었다는 것도 내 하반신이 인간이라는 문장 너 알고 있으면서 그날의 구름을 오독했던 거야 동화가 달랐다 나는 오빠의 방식이 무서웠다 인어는 풍성한 머릿결이 아니라고 아가미로 숨을 쉬었기에 키스를 못한 거라고 그리하여 비극이라고 네가 하늘을 달린다 팽팽한 바람으로 구름은 구름이 숨쉬는 것의 지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누워서 구름의 생김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노을이 하혈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는 그 시간대 새..
2020.11.21 -
김희준 / 방황하는 마틸다
김희준 / 방황하는 마틸다 첫 키스는 열 살, 사과가 목에 걸려 울었을 때 그녀가 혀로 조각을 꺼내주면서야 그게 아니라면 알코올중독자 친구 아버지 무릎에서였나 주인이 없는 책상과 의자는 어떻게 될까 방과후에 남겨진 책상이 오래 말을 하는 것을 보려고 기다렸어 아무도 찾지 않는 의자가 부식된 바람이 되는 것도 보았지 며칠 뒤 눈두덩에 멍든 채 학교에 왔어 전봇대에 부딪혔다고 웃는 개의 말을 믿어줘야 했지 집 나왔어 문구점에서 눈치를 보다가 은행놀이 세트의 가짜 돈을 훔치고 주인한테 머리를 맞았지 달리기가 빠른 아킬레스건을 훔쳐보았어 그해, 빵집에서 새어나왔던 여름 말이야 복숭아 타르트와 사과파이로 구워져야 하는 제철 과일에 대해 잡종으로 태어나게 해준 너의 아버지와 도망친 어머니의 이종교배를..
2020.11.21 -
김희준 / 싱싱한 얼굴
김희준 / 싱싱한 죽음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 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있다 김희준 / 싱싱한 죽음 (편집부, 시와 문화..
2020.07.09 -
김희준 / 생경한 얼굴
김희준 / 생경한 얼굴 따라와 바다를 지나면 골목이 나올 거야 왼쪽으로 돌거나 두 블록 먼저 꺾거나 아무튼 전등이 축축하게 켜질 때 첫 번째로 보이는 여관 말이야 거기서 혼자가 아닌 우리였던 적이 있어 비린내 나는 이야기지만 바다가 고요해지고 달이 차오르면 낯선 냄새로 북적이는 그 동네 말이야 여관 방 벽지에 낙엽이 말라가고 그리움이 천장까지 닿을 때 우리는 버석버석한 섹스를 나누었지 그날 우리는 시소를 탔어 갈망의 무게만큼 발돋움이 심했던가 나는 언제나 낮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너는 모래에 발이 패인다고 투덜거렸지 돌아온 방안에서 우리는 양말을 뒤집어 조개를 찾거나 퇴적층 겹겹이 냄새를 말렸어 몰래 배가 부풀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 내 몸에 쌓이는 게 모래나 바다라면 잠든 네 발로 내 속..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