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정우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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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신 「홍콩 정원」
끊긴 꿈으로부터 재생되는 살점 * 날개를 가지런히 접어놓고 결정하지 못했지 육교보단 모텔이 모텔보단 강물이 낫겠지 거기 예술가 너를 뭐라 불러야 하지? 장화 속 거머리들, 대형 비닐 봉지, 라벤더 비누 중력을 두려워 마 시간과 속도의 문제일 뿐이야 음악이 잊게 해줄 거야 * 네가 피어난 자리 나는 약간 휘청거렸다 살을 만져봤다 분장을 하고 객실에 얌전히 있었는데 따듯한 나라로 이동 중이었는데 진통제, 염주, 플랫슈즈, 기차표, 미술관 입장권 나를 찾는 데 도움이 될까요? 살아버렸습니다 빠르게 다 살아버렸어요 해부하고 마시는 것은 나의 취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한 날이 있어요 * 옷깃을 잡거나 사과를 떨어뜨려도 나는 알 수가 없는데 이슈가 필요한데..
2021.04.26 -
정우신 「베이스캠프」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염소 발목을 부러트려 십자가를 만들었다 우리는 눈보라의 어디쯤을 짚어보고 있을까 난로 위에서는 물이 끓고 나는 네가 기타 가방에 그려놓은 동물이 오길 기다렸다 뿔과 날개가 있고 다리가 없는 그 동물, 우리의 얼굴이 반반 섞여 있는 그 동물 내가 위태로울 때면 너는 따듯한 술잔을 들고 꿈에 나타났다 우리는 머나먼 바다까지 흘러가기도 하고 사냥당한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별을 바라보곤 했다 침낭 지퍼를 머리끝까지 잠그고 죽음의 두께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먼저 갔듯이 눈발은 발자국을 오래 남기지 않는다 기도를 하다가 멈추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정우신,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2021.04.26 -
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단풍이 들면 어떤 결정에 확신을 주듯 비가 내렸다 혹은 그 결정을 머뭇거리게 하듯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를 묶다 보면 나는 공구 상가 뒷골목의 절단된 환봉처럼 서늘하게 굴러다녔다 자꾸 끊기는 빗줄기 속에서 너희는 투명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쇳덩이를 자르고 자루에 담으며 골목을 지키다 보면 나는 달궈지고 깎여나가고 녹아내렸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는 밤거리를 몇 바퀴 돌다가 너희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냄새 함께 마셨던 차 마지막 순간의 그 눈빛을 돌게 했다 얼굴을 보려는 순간 톱날 내가 시작되는 건 너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그곳까지 자라지 못하는 건 톱날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잡초를 뽑다가 펭귄이 딸려 나올 일은 없을 텐데 진심을 담은..
2021.01.01 -
정우신 「리플리컨트 노트」
다음번 잠은 깔끔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나는 왜 자꾸 눕지 스르륵 날리지 허리에 흰 천을 감고 내려앉고 싶다 온도가 달라지는 빛을 겪으면서 조금 더 자라고 싶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손의 모양이 달라진다 투명에 가까워진다 생아편이 들어 있는 식물을 가꿀 시간은 없겠지 아늑하고 느리게 이빨을 뽑고 아가미를 달 것이다 낯선 숨을 머금고 너의 꿈속으로 불쑥 찾아갈 것이다 알약을 모으고 신발을 정리했어요 바람이 기다란 머리카락을 갖고 싶다고 말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나를 자주 떠올릴 수 있을지 나를 걱정해주던 그 눈빛으로 내 이마를 쓸어준다면 좋을 텐데 아주 깊은 잠에 빠질 텐데 깨어날 때마다 사라지는 등 평생 불안에 떨며 뛰어다니던 영양은 어느 날 무리에서 이탈하기로 작정했다 내심 ..
202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