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주하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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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모티바숑*」
파리의 겨울은 늘 세 번째 전생 같다 결혼식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류에게 프로포즈를 받았어 결혼식 사진이 나왔는데 누구도 날 찾지 못해 프랑스에 머문 친구들은 그런 말을 자주 했어 갔다 오면 정신병자가 되거나 우울증을 앓게 된대 가보지 않고 앓는 병은 어떤 걸까 하녀방이라 불리는 곳에 살았어 옥탑으로 민트색 바람이 불지 처음엔 소공녀 다락방을 떠올렸어 파리에 동화 같은 건 없는데 거기선 늘 바닷물에 발이 젖는 꿈에 빠져 방 모서리를 타고 들려오던 목소리 창이 그리워 생샤펠 성당에 갔어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 굴절된 빛들이 창을 통과하고 갑자기 유리들이 와장창 머리 위로 쏟아진대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 오는 일을 그것이 쏟아지는 것을 복원가들은 왜 천사의 한쪽 ..
2022.04.20 -
주하림 「오로라 털모자」
내 기억은 온전치 못한 것이기에 편지를 써두어요 겨울을 보냈어요 드레스를 입은 환자가 들판을 달려 엊그제 오해 때문에 떠나보냈던 남자 뒤를 쫓기 위해 고무오리인형을 타고 암흑뿐인 호수를 건너 조금씩 더 슬퍼져 가는 정신병자처럼 입가에 사탕부스러기를 붙이고 그것들이 떨어질 때까지 겨울 떡갈나무에도 입술이 생기길 바랐어요 잘생긴 귀가 보이는 기다랗고 멋진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얼어붙은 땅 따위 걷어차고 침대 속에 오래 묻어 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글과 익은 열매와 멍든 과일주 와 한 가지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거기에 흩어진 주근깨 같은 당신을 보았어요 피부를 뚫고 나온 흙투성이 발톱 쐐기풀 망태기를 뒤집어쓰고 죽음과 나누던 이야기를 창밖으로 다른 나라 말로 비명을 지르는 눈사람 북유럽 동화를 읽어 ..
2021.02.24 -
주하림 「언덕 없는 이별」
우리는 도서관 통로에서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어떤 영혼이 지나온 길고 무거운 한숨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의 스위스 화가 그림이 걸려 있다 키스를 나눈 도서관 창문으로 벚나무 가지들이 들어왔고 마침 깨어난 개구리가 아무도 없는 밤의 연못을 헤맨다 우리는 그때까지 어떤 것으로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때 조용한 가축들의 울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의 마른 등 뒤로 십일 번 트랙을 들려주었고 너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연주자의 긴 이름을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때 시간은 구소련 음악가들의 무대처럼 춥고 넘쳤지만 세상의 이목을 피해 천사가 연주하던 곡은 실은 신의 조롱으로라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대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나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화면 속에 너는 흑백으로 죽어간다 우리는 침묵을 깨는 입맞춤* 사라..
2021.02.24 -
주하림 / 아비뇽 시내에 있는 기차역(Gare d'Avignon Centre)에서 기차를 타고 어제는 비 오는 아를(Arles) 그리고 아라타에게
주하림 / 아비뇽 시내에 있는 기차역(Gare d'Avignon Centre)에서 기차를 타고 어제는 비 오는 아를(Arles) 그리고 아라타에게 기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자고 다짐했었지 해변에서 영원히 아픔 같은 건 모르고 바위틈을 기어다닐 갯강구를 보며 징그럽게 다리가 많아 나는 그렇게 속닥였다 사진도 찍고 인 자오양 그림에 파묻히기도 했지만 하지만 네 품이라면 어떨까 난 남을까 내 모습은 그 안에서 남겨질 수 있을까 아라타…… 난 여기 있어 아라타는 물어 내가 바람둥이라도 좋아? 성 밖의 거지나 인간쓰레기라도 인 자오양 그림만 편식하고 야채는 골라내고 널 안으려고 숨을 헐떡이는, 그럴 때 나는 습기와 독버섯으로 가득한 숲 속을 생각하지 어둠에 모인 울프들이 이를 번뜩이면서 살점을 뜯어내는 ..
2020.12.11 -
주하림 / 병동일지 902
주하림 / 병동일지 902 병원에 온 지 두달. 병원에 와서, 병원 오기 전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다고 고백해본다 내가 태어난 곳은 똥물 종종 고향을 뒤집어쓰고 이방인들 대화를 엿듣는다 뒤집어쓴 똥물이 똥물이 될 때까지 가을풍이 여름풍이 될 때까지 우주가 산수가 될 때까지 추론이 귀납이 될 때까지 면회가 폭력으로 바뀔 때까지의 날들, 사는 것이 죽는 것으로 넘어갈 때 일부러 힘을 빼고 걷는다 밤마다 옆 병동 남자가 찾아와 숨죽이고 섹스한다 나의 물이 달아서 좋다는 남자; 진실에 이르는 계절들에게서 갈색빛이 난다 부디 그 슬픔 너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공백공백공백' 꽃들은 어둠 속에서 폭죽으로 펑펑 터지고 나는 눈 먼다 내가 사랑이어서 나는 사랑밖에 할 수 없었다 열병을 앓을 때마다 식은..
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