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이기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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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꽃꽂이」
어쩌면 며칠 생활을 잠시 두고 온 것뿐인데 오늘은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날이 벌써 밝아지고 있어서 수평선이 보일 것 같아서 숲을 걷다 노래를 부르고 생선 구이를 먹다 혼자라는 단어에 가시가 박혔길래 그냥 살다 보면 다 넘어가겠지 싶었는데 그런 결론은 너무 무책임했는데 책임지는 건 또 왜 이리 싫은지 보기만 해도 좋을 이 삶을 누가 꺾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았습니다 갑판 위에 올려놓은 말린 오징어들 뜯은 빵 부스러기들 나날들 모두 당신 것이지요 눈빛을 부러뜨리고 도망쳤습니다 구두를 벗으니 살갗이 까진 뒤꿈치 바다는 혼잣말을 하지요 계절을 실재하는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 비와 눈이 내리고 나무는 열매와 잎을 맺고 열매와 잎을 떨구고 바닥은 낙엽을 치우고 ..
2022.04.20 -
이기리 「꽃과 생명」
은은한 불빛의 회복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비로소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는 마취가 풀리려면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절대 자세를 바꾸지 말고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했다 회색 커튼 너머로 어느 한 노인이 마른기침을 하며 오줌통에 소변을 보고 있었고 적당한 무기력은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퇴원하는 날 새로운 반지를 하나 살 거라고 말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주사도 빼 드릴게요 같은 말들이 일상적으로 들렸고 너는 이곳의 벽이 흰색이 아니라 하늘색이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바지에 묻은 소고기뭇국을 스스로 닦을 수도 없을 때마다 밀려오는 아침 속에서 항생제가 한 방울씩 낙석처럼 떨어질 때마다 주먹을 쥐어 보기도 하고 옷을 벗어 봉합된 자국을 ..
2022.01.13 -
이기리 「저녁의 대관람차」
이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한 사람의 눈동자를 완성할 수 있을까 야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도시의 불빛을 보러 온 것인지 도시가 어둠에 잠긴 풍경을 보러 온 것인지 자물쇠가 반짝였고 비밀이 풀리는 순간을 함께한다면 어떤 기억은 떠오르다가 투명한 바늘에 찔린 것처럼 순식간에 터진다 층계를 밟는다 미끄러운 바닥조차 없는 빛을 잡을 수도 없는 공중은 평평하고 약간 따뜻하다 아직 바다도 꼭대기는 아니다 스스로를 가두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 도달하려는 노력 없이 그런 기분만을 가지면 된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도 놀이터에서 비눗방울을 만드는 아이들이 보인다 머리카락에 벚꽃 잎이 붙은 줄도 모르고 비눗방울 속에 들어 있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폴짝 뛰어오르다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기..
2021.02.10 -
이기리 「궐련」
머리는 바닥에 빠르게 떨어지기 위해 가장 무겁게 만들어진다 입술 자국이 묻은 문장은 금세 재가 되어 가라앉는다 그릇이 다 채워져 뚜껑을 덮어 버리면 아직이라는 부사를 자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일 것이다 볼링공이 무표정으로 레인을 구르다가 핀을 쓰러뜨린다 아홉 핀이 뒤로 넘어가고 남은 한 개의 핀을 향해 구르는 공 스페어 실패 스핀도 없이 도랑으로 빠지지 다 같이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 숨을 나눠 마시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뒤섞인 냄새가 온몸을 더듬는다 테이블에 칸막이를 설치한 식당에 앉아 얼굴을 묻고 국수를 들이켠다 밥을 먹을 때 숙이는 등의 기울기를 따라 그림자도 휘어진다 두 갑 정도 태우면 채울 수 있을 형상이다 썩어 문드러졌을 속이지만 같은 색깔은 같은 색깔로 지울 수 있다..
2021.02.10 -
이기리 「코러스」
너는 점심시간만 되면 식당에 가는 대신 빈 교실에 남아 도시락을 먹었고 나처럼 매일같이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갔다 그리고 너는 내가 걸어 둔 외투에 항상 자신의 외투를 겹처 걸어 두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너는 엽서만 한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이 책장을 넘기는 사이사이에 눈송이처럼 떨어져 녹아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읽던 책을 잠시 시옷자로 덮어 두고 옷을 챙기고 나가 운동장 주변을 좀 걷다 들어올까 싶다가도 나의 외투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너의 외투를 바라보고 나면 그 자리에서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전화를 받으려고 황급히 나가는 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두고 간 수첩을 집어 들었다가 가만히 내려놓았다 수선스러웠던 복..
2021.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