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최백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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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해적 방송」
이제 우리는 서로의 이방인이다 희고 뜨거운 밥상을 수백 번 물릴 때까지 한 줄도 그대를 잊지 못했다 지구로 향하던 운석이 환하게 흩어지고 가족을 가진 인간들이 집으로 파한 이후의 광장이 있다 후드를 입고 슈퍼스타 밑창이 닳아가도록 보드가 아스팔트를 갈랐다 청바지에 손을 숨긴 채 도로 끝을 바라보았다 양치를 하고 외투를 벽에 걸고서 유난히 하얗던 지난여름의 일들을 생각하며 식료품을 정리하다가 의자에 앉아 느리게 연필을 깎는다 안다 머리를 묶지 않는 그대의 귀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쉽게 죄를 짓던 손으로 블록을 조립하고 합정역에서 상수역까지 걸었다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지인과 연락을 끊고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고 조용히 야위어가며 식은 바닥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산다 ..
2022.01.14 -
최백규 「수목한계」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무 일도 아직은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양안다, 최백규, 너는 나보다 먼저 꿈속으로 떠나고, 기린과숲, 2021
2021.07.09 -
최백규 / 낙원
최백규 / 낙원 그해 봄은 성한 곳 없이 열을 앓았다 살을 맞대어 서로에게 병을 안겨주던 시절이었다 눈더미처럼 누워 화관을 엮었다 불 지르고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창을 열어두고 살았다 보낸 적도 없는데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있어서 문턱을 쓸듯이 늦은 저녁을 차리며 끓어 넘치지 않도록 들여다보는 사이 과일은 무르고 이마가 식지 않았다 최백규 / 낙원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15 -
최백규 / we all die alone
최백규 / we all die alone 가난한 애인이 장마를 삼켜서 어지러웠다 숲속에서 망가진 나무를 되감을 때마다 세상엔 일기예보가 너무 많고 내가 만든 날씨는 봄을 웃게 할 수도, 떨어뜨릴 수도 없어서 시들겠다는 비근함을 믿고 싶어졌다 마른 손목과 외로운 눈동자도 썩 어울렸다 거룩한 꽃을 오래 밟다가 잠들면 바람이 다 자살할 때까지 망가져 내리는 유성우 내일 밤 현실에 따뜻한 천사를 보면서 그곳이 천국이라 생각할 텐데 지금은 이대로 사라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내가 있고 어제 들은 음악과 며칠 전 봤던 영화에서도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만 사라져서 네가 웃을 때마다 누군가와 손잡고 걷는 꿈들을 꿨다 우리는 슬픈 것이 닮았고, 피가 달라서 더 슬프다 죄를 안고 함께 목 놓아 울어줄..
2020.09.15 -
최백규 / 열대야
최백규 / 열대야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 최백규 / 열대야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