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박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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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세상 끝 등대 3」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2021.07.15 -
박준 「84p」
받아놓은 일도 이번 주면 끝을 볼 것입니다 하루는 고열이 나고 이틀은 좋아졌다가 다음 날 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삼일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젊어서 학질을 앓은 주인공을 통해 저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서른 해 정도를 더 살다 갑니다 자작나무 꽃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암꽃은 하늘을 향해 피고 수꽃은 아래로 늘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입니다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놓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창밖으로 겨울을 보낸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
2021.07.15 -
박준 / 발톱
박준 / 발톱 중국 서점이 있던 붉은 벽돌집에는 벽마다 죽죽 그어진 세로균열도 오래되었다 그 집 옥탑에서 내가 살았다 3층에서는 필리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모여 밥을 해먹었다 건물 2층에는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모이는 당구장이 있었고 더 오래전에는 중절수술을 값싸게 한다는 산부인과가 있었다 동짓달이 가까워지면 동네 고양이들이 반지하 보일러실에서 몸을 풀었다 먹다 남은 생선전 같은 것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면 어미들은 그새 창밖으로 튀어나가고 아비도 없이 자란 울음들이 눈을 막 떠서는 내 발목을 하얗게 할퀴어왔다 박준 / 발톱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03 -
박준 / 파주
박준 / 파주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머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박준 / 파주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2 -
박준 / 야간자율학습
박준 / 야간자율학습 저녁이면 친구들은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주공아파트 단지를 돌며 배달을 했다 성동여실 여자애들은 치마통을 바짝 줄여 입었지만 안장을 높이 올린 오토바이에도 곧잘 올라탔다 집을 떠나면서 연화는 가난한 엄마의 짙은 머리숱과 먼저 죽은 아버지의 하관(下觀)을 훔쳐 나와 역에서 역으로 떠났다 황달을 핑계로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책상 밑에 있는 내 침통이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졸업은 멀기만 하고 벌어진 잇새로 함부로 뱉어낸 말들이 후미진 골목마다 모여앉아 낄낄 웃고 있었다 박준 / 야간자율학습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