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김중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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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
뉴스속보가 거실 한쪽에서 왕왕거리고 저녁식사 중인 엄마는 다몽증 환자 꾸벅꾸벅 잠결에 내 잠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거대한 태풍 '불면'이 1899년 이후 니이가따현 쪽으로 하루에 일 센티미터씩 북상 중이다 북상 중인 달팽이…… 태풍의 이동경로를 따라 장거리주자인 나는 불면의 중심에 가건물로 세워진 재해대책본부가 있는 결승점을 향해 오늘 밤도 달리는 중이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이봐, 힘들게 너는 왜 하필 지금 잠을 청하려 하지? 오늘 밤엔 재밌는 일도 많은데 나는 적요한 불면의 눈을 향해 줄곧 달리는 중이다 나는 돌풍이 휘몰아치는 불면 속에서 팥죽 같은 잠을 뚝뚝 흘린다 길가의 창문을 티슈처럼 뽑아 모공 속에서 줄줄이 기어나오는 잠을 닦는다 작고 끈적하고 더운 뱀…… 순간 지진으로 땅이 길게 ..
2021.07.15 -
김중일 「불면의 스케치」
늙은 고양이 한마리가 아름답게 무뎌진 발톱으로 분리수거된 비닐을 뜯자 구름과 모래가 뒤섞인 저녁이 툭 터져나왔다. 오래 자란 수염을 태운 혹독한 냄새를 풍기며. 오랜 정전 속에서 매일 우리는 함게 모여 촛불을 불었다. 훅 태양이 한쪽으로 길고 까맣게 누운 사이, 우리집에는 검은 모자를 뒤집어쓴 이방인처럼 어젯밤이 찾아와 뜬눈으로 묵어갔다. 꺼진 줄 알았던 촛불은 되살아났다. 촛불과 촛불 사이에 놓인 침대 입술과 입술 사이로 빼문 허연 혀처럼 흘러나와 있는 단 한 조각의 미명 수북한 음모는 우리를 길 위에 그려넣던 그가 너무나 지루해서 연필을 쥔 채 깜빡 졸았던 흔적 창문이라는 맨홀 속으로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서로 뒤섞이며 떨어진다. 지붕 위로 촛농처럼 비가 떨..
2021.07.15 -
김중일 「품」
변변히 내세울 만한 원한도 없는 우리 대부분의 귀신들은 무일푼으로 구천에 남아 있습니다. 혈관 속을 이백쯤으로 확 내달릴 만한 압력. 생전 그런 건 없었어요. 뭔가 약간씩 부족했죠 뭔가가…… 기쁨도 고통도. 그것이 명부로 가는 티켓 마일리지 같은 것인데 말이죠. 살아생전 정신적 노동에 대한 댓가라고 할까요. 이상한 냄새였어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이한 신음 같은 그런 냄새였어요. 어쩐지 냄새에 가까운 소리였는데, 굳이 얘기한다면 오래된 사체를 태우는 듯한, 쥐어짜는 듯한. 그때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죠. 그냥 한번쯤 나를 맛보고 싶을 때, 가만히 혀를 빼어물고 액셀을 끝까지 밟고 있으면 차내에 가득 차오르던 핏빛 적막에 휩싸여. 그때가 아마 백팔십쯤 됐을까요. 시간을 거스르기 시작하는 속도..
2021.01.28 -
김중일 / 물고기와 산다는 것
김중일 / 물고기와 산다는 것 물고기와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상처투성이 한 아이의 두 눈에서 물고기가 뚝뚝 떨어졌다. 물고기를 주워 불에 구웠다. 두툼하고 부드러운 하얀 살을 뜯으며 배를 채웠다. 아이를 잃고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한 엄마의 두 눈에서 한 세상이 전봇대보다 길게 뚝뚝 떨어졌다. 떨어진 세상의 표면에 달라붙은 창문이 젖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였다. 떨어지 물고기처럼 세상을 주워, 밤의 창문으로 긁어내고 불에 구웠다. 그을린 세상으로 배를 채우고 뼈만 앙상한 세상을 깊은 밤에 풀어놓았다. 온종일 슬픔을 집어먹고 저녁이면 다시 살이 꽉 차오를 것이다. 아침에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신발 속에 가시처럼 뼈만 남은 물고기가 누워 있다. 김중일 / 물고기와 산다는 것 (김중일, 가슴에..
2020.08.24 -
김중일 / 최선을 다해 하루 한번 율동공원 돌기
김중일 / 최선을 다해 하루 한번 율동공원 돌기 아버지 공원이라도 좀 도세요. 어머니도 이제 건강을 생각하세요.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네 어머니를 신경 써라, 우울증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설거지를 했고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부엌으로 걸어가 어머니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보석함 속의 청혼 반지. 아버지는 푸른 옥빛 상자를 열듯 주름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어머니 이마를 열고 누런 금반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봐라,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지구에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오늘도 지구라는 고장난 낙하산이 우주의 길바닥에 터진 풍선처럼 떨어져 있다...
2020.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