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이혜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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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손차양 아래」
만들어낸 그늘 밑 잠기는 볕 말려드는 이마와 말들이 겹치는 잠시의 잎사귀 속 죽은 자의 이마에 얹히는 부드러운 흙 같은 그런 색은 불안해 캄캄한 피들을 이어붙여 손 안쪽에 넣어두다니 낯설어진 옆얼굴을 바라보며 눈가에 드리워진 얼룩이 얼굴로 달라붙는데 부러 지어먹은 마음이 절벽을 만들 때 여름을 끌고 오는 손짓들이 미리 당겨 무덤을 쓰나 빛으로 뭉쳐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반만 남은 입술을 바라본다 너의 화환이자 나의 죽은 꽃을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2021.05.06 -
이혜미 / 뜻밖의 바닐라
이혜미 / 뜻밖의 바닐라 귓바퀴를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졌지. 미묘한 요철을 따라 흐르는, 그런 혀끝의 바닐라. 수없이 많은 씨앗들을 그러모으며 가장 보편적인 표정을 지니려. 두근거리며 이국의 이름을 외웠지. 그건 달콤에 대한 첫번째 감각.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각별한 취향. 녹아내리는 손과 무릎이 있었지. 차갑고 뜨겁게 흐르는, 접촉이 서로를 빚어낼 때. 소리의 영토 안에서 나는 세로로 누운 꽃. 손끝에서 점차 태어나. 닿아 녹으며 섞이는, 품이라는 말. 그런 바닐라. 적당한 점도의 안구를 지니려. 모르는 사람을 나는 가장 사랑하지. 잃어버리는 순간 온전해지는 눈꺼풀이 있었다. 순한 촉수를 흔들며 미끄러지다 흠뻑 쓰러지는. 이혜미 / 뜻밖의 바닐라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
2020.11.28 -
이혜미 / 근린
이혜미 / 근린 곧 만나 어둑한 공원 냄새가 났다 서성이다 희미해지는 마음 너무 가까워 닿지 못하는 공원의 발자국들 다정한 이웃들은 일요일 속에 있고 희박해지는 인사들은 어긋난 체온을 지니는데 우리는 무엇을 가졌나 무엇에 녹아내렸나 그건 왼쪽을 찢고 나온 말 곧 만나 곧 만나 나무가 색색의 손인사들을 맞추어 낯익은 단어를 완성하는 공원에서 약속을 생각하면 입술이 녹아내린다 평생 모아둔 라일락을 탕진한 늦봄처럼 이혜미 / 근린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젖은 솜으로 기운 외투를 덮고 잠드는 나날이었다 몸 안의 물기를 모두 공중으로 흩뿌리고서야 닿을 수 있는 탁한 피의 거처가 있다 내 속을 헤엄치던 이는 순간의 바다로 흘러갔다 젖어들고 나서야 문장의 끝이 만져지는 기이한 세계 굳어버린 혀에 안개가 서리면 입속은 수레국화를 머금은 듯 자욱해진다 어깨를 털어내는 새의 깃털 속에서 계절은 문득 오랜 미신이 되었다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이혜미 / 불면
이혜미 / 불면 해안가를 따라, 썩어가는 물속에서 고양이의 머리뼈를 건졌을 때 살찐 나의 몸이 못내 부끄러웠다 기괴한 형상의 돌들이 온갖 비유들을 모아쥐고 굳어갔지만, 그게 그들의 정처일 리 없었다 홉뜬 눈에 비해 풍경은 늘 비좁았으므로, 신발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얼룩진 눈을 한 채 새벽을 기다렸다 그날의 그림자는 꼬리를 길게 끌며 사라졌다 배웅과 마중, 서로를 견디는 방식 어떤 증식을 위해 이토록 많은 모래들과 떠도는 바람이 필요했던 걸까 더럽혀진 몸을 만질 때마다 자궁 속에서 순하게 죽었다는 남동생이 부러웠다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고 잠들 수 있을까? 감은 눈의 흰자위가 빠르게 녹아들면 젖은 나무들은 백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불완전한 더듬이를 뻗어 잊혔던 풍문을 삐걱 열어본 ..
202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