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안희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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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
2021.06.29 -
안희연 「설경」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이나 펑펑 와버렸으면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엉망이어서 개들이라도 천방지축 환하게 뛰어다닐 수 있게 새하얀 눈밭이었으면, 했지 그래서 그리기 시작했다네, 눈에 파묻힌 집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깨진 계란껍질 같던 마음도 같이 파묻었지 캔버스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곰은 곰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고 가고 모두들 자기 발자국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 집은 악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소리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지붕까지 파묻힌 집이 어떻게 공포스럽지 않은 거야? 내게는 모든 게 엉망이었던 시간인데 사랑과 낮잠은 참 닮은 구석이..
2021.03.21 -
안희연 /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매일 아침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빛기둥 아래 놓인 색색의 유리구슬 갓 낳은 달걀처럼 따뜻한 그것을 한가득 담아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유리구슬을 넣어 빵을 굽는다 빵 하나에 구슬 하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향긋하지 않은 것은 없다 실수로 구슬 하나를 떨어뜨린 날 할아버지께 호되게 혼이 났다 아가야, 저 침묵을 보거라 한 사람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흩어진 유리 조각 틈에서 물고기 한마리가 배를 뒤집고 죽어 있었다 손그릇을 만들어 물고기를 담으니 기린처럼 목이 길어졌다 할아버지,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이에요? 파닥거릴 수 없다는 것은 빛나는 꼬리를 보았다 두 눈엔 심해가 고여 있었다 층층이 빵을 실은 트럭이 지상을 향해 가는 ..
2020.09.02 -
안희연 / 업힌
안희연 / 업힌 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 하는 강아지를 봤어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중얼거리는 하루 이대로 입이 지워져버렸으면, 싶다가도 무당벌레의 무늬는 탐이 나서 공중을 떠도는 먼지들의 저공비행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하루 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란 무엇일까 화면 속 강아지는 여전히 죽은 척하고 있다 꼬리를 툭 건드려도 미동이 없다 미동, 그러니까 미동 불을 켜지 않은 식탁에서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이 나뭇잎에서 저 나뭇잎으로 옮겨가는 애벌레처럼 그저 하루를 갉아 먹는 것이 최선인 살아 있음, 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은 ..
2020.09.01 -
안희연 / 12월
안희연 / 12월 겨울은 빈혈의 시간 피주머니를 가득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만 생각나 입김 한 번에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이곳엔 너무너무 많다 너무라고 말하지 않고 너무너무라고 말하는 것 그래도 겨울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겠지 그래서 당신은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 앞에서 나는 나날이 창백해진다 이렇게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걸까 기도가 기도를 밟고 오르는 세상에서 헐렁헐렁 산책하는 일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축축한 영혼을 나라고 부르는 일 다행히 겨울은 불을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나에겐 태울 것이 아주 많고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있어서 좋다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 그냥 사는 거지" 불 앞에서 다 식은 진..
2020.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