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조원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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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효 「앙드레 브르통의 말」
아침에 벨이 울려 복도가 깬다고 할 수 있을까 이별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그림자를 밟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장밋빛 비누 받침, 수평적이고 안전한, 그러므로 스페인 소년이 등장할 것 같고, 문을 두드리며 입속에 맴도는 말을 뱉다가, 리볼버 총탄이 떡갈나무에 구멍을 낼 것 같고 경찰이 와도 멈추지 마, 나는 중얼거리며 스페인 소년의 정지된 입술을 한참동안 지켜본다 해가 지는 방, 뜨거운 사과, 오븐 속에 넣어둔 비명, 마을 사람들이 안뜰에다 올가미를 설치해놓는 이미지, 그런 의혹이 부풀어 올라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스페인 소년의 걸음은 내 앞을 지나치기 때문에, 나는 낮잠에 빠져들어야 한다 가령, 소파 팔걸이를 짚고 잠에 드는 모습, 커튼 뒤로 숨은 소년의 발가락을 밟고 모른 체 하는 불친절함, 자동차 경..
2022.01.14 -
조원효 / 불청객들
조원효 / 불청객들 애인은 자주 손목을 그었다 고독한 여왕처럼 아침이면 나와 식탁에 마주 앉고. 철제 갑옷도 맞춰 입고. 빳빳하게 굳은 손목으로 체스를 두었다. 체스 판이 입을 벌린다. 왜 그렇게 혀를 날름거리니. 소매 틈으로 피가 흐르니까. 벽난로가 불타오른다. 창문에 부딪힌 새 떼가 자꾸 같은 패턴으로 죽는다 문 앞에 손님이 벨을 눌렀다. 경찰이야. 잘 부탁해. 나는 바게트 빵에 대해 생각하고 영국의 궁전에 대해 말할 줄 알아. 나쁜 피를 흘렸지만 구체성은 없어. 그녀의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체크 메이트 해가 지면 체스 판이 작아진다. 화분에 놓인 돌이 간신히 호흡한다. 네가 비숍을 움직일 걸 알아.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내가 작은 나라의 왕이라고 말했다. 몸을 일으켜..
2020.12.12 -
조원효 / 눈 내리는 아프리카
조원효 / 눈 내리는 아프리카 빈 땅콩을 깨물었어 앞니가 깨져서 달리는 기차 안으로 해가 들어왔지 낮은 옅어지고 붉은 맛은 붉은 맛 애인은 오래된 영화를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는데 겁에 질린 사람처럼 중얼거려 창밖의 풍경을 봐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는데 화물칸에 모래먼지를 듬뿍 묻혀가며 기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린다 바퀴가 녹아가니까 앞니가 흔들리지 낮은 선명해지고 애인은 갑자기 울고 이유를 물어도 말하질 않는데 꼬리 칸에서 노름을 하던 여자들은 마시던 술을 멈췄지 단지 햇빛이 비추는 곳으로 손을 들었고 같은 맛의 손가락만 빨아댔지 기차는 햇빛을 싣고 가볍고 왜소해 질 때까지 무작정 달릴 뿐 기차는 알기 위해 달리고 알지 못해 달릴 뿐 앞니가 와르르 복도에 쏟아진다 창가에 얼굴을 대면 이빨 사..
20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