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박민혁(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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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혁 「모호한 슬픔」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나 봐요, 감추어 둔 희망을 들키는 기분 미래는 너무 많은 오늘을 약탈해 가고 있다 결국 너는 쥐가 난 슬픔 쥐가 난 왼손을 오른손으로 만졌을 때의 낯선 감촉 같은 거 이제 너는 공휴일에서 제외된 기념일 같다 한 여자애의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일 너에게 없던 비립종 같은 걸 사랑하는 일 애인이 너의 이름을 발음할 때 멀미가 느껴지는 일 사랑은 왜 오전과 오후 사이에서만 기생하는지 이런 불가능한 시간이라니 운명이 뿌리고 간 겨우 한 자밤의 슬픔에 나는 이렇게도 엄살을 부리나 아직도 나, 내가 낳은 슬픔을 두고 훗배앓이 중 어쩔 건데, 이런 감정 모든 연애의 끝은 궁금한 궁금하지 않은 부모님의 굴욕 같은 거 나의 절망 역시 사행성이 짙습니..
2022.01.17 -
박민혁 「그 후」
슬픔을 경제적으로 쓰는 일에 골몰하느라 몇 계절을 보냈다. 나를 위탁할 곳이 없는 날에는 너무 긴 산책을 떠난다. 목줄을 채운 생각이 지난날을 향해 짖는 것하며, 배변하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건 거의 사랑에 가까웠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는 식의 문장을 떠올려 본다. 모든 불행은 당신과 나의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온다. 병구완이라도 하듯 아침과 저녁은 교대로 나를 찾아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좋은 냄새가 나는 아기를 안아 주고, 도닥여 준다. 아기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인생이 아니라 기어코 비극적이려는, 고삐 풀린 그것을 길들이는, 인간이다. 집에 놀러 온 신은 내 일기를 들춰보다가, "신이란 신은 죄다 불량품인지, 뭘 가지고 놀든 작동이 잘..
2021.03.25 -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액상의 꿈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매달고, 생시 문턱을 넘는다. 애인의 악몽을 대신 꿔 준 날은 전화기를 꺼 둔 채 골목을 배회했다. 그럴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누군가는 건반을 두드린다. 비로소 몇 마디를 얻기 위해 침묵을 연습할 것. 총명한 성기는 매번 산책을 방해한다. 도착적 슬픔이 엄습한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부모에게서, 향정신성 문장 몇 개를 훔쳤다. 아름다웠다.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외한다. 우리들의 객쩍음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유 없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나의 지랄은 세련된 것. 병법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나의 편견이다. 불안과의 잠자리에서는 더 이상 피임하지 않는다. 내가 돌아볼 때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비극을 연기한..
2021.03.25 -
박민혁 「38」
나는 너를 속되게 이르는 말. 방법을 모르니 인생은 영 재미가 없다.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입 맞추던 일이나, 낯선 연립주택 불 꺼진 계단에 나란히 앉아, 미성년처럼 서로를 더듬던 일만 생각난다. 사실상 네가 관내분만한 슬픔이 이만큼이나 자랐다. 그리고 나의 활유 속에서 꽤 유복한 생을 누린다. 시인은 출구가 없는 미로를 그려서는 안 된다. 절망이라는 진부한 단어를 쓰고 싶지 않아서, 절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심각한 정서 학대를 당했지만, 전혀 재밌지 않은 농담에도 아주 재밌다는 듯 실감 나게 웃어 줄 수 있다.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 2021
2021.03.25 -
박민혁 「23」
우리 좀 이상해, 그치? 내가 미쳐 버린 건지도. 너와 내가 지난날의 우리를 연기하며 살가운 애인인 척하고 있다. 네가 막차 시간을 알아봐 주던 시간에, 이제 나는 느리게 네 야윈 몸을 쓸어 본다. 내가 아끼는 거 알고 있지? 응. 그럼 됐어. 누구나 실감 나는 그리움을 위해 후회할 거리 몇 개쯤 남겨 두는 거다.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 2021
2021.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