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김이듬(5)
-
김이듬 / 오늘도
김이듬 / 오늘도 마감일은 지났고 쿠폰 사용 기간도 넘겼고 케이크도 상했고 미련스레 기다리던 사람도 욕을 하며 떠났다 아버지도 죽었다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아랫배는 아프고 생리는 안 터지고 달걀은 프라이가 되거나 치킨이 되고 인간도 아닌 것이거나 인간 이상이거나 다 인간이고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많은 소리를 지껄였고 검은 코트는 다섯 벌이나 되고 갔으면 갔다가 돌아왔을 시간 동안 잤으면 수만 가지 꿈에 빠졌다가 일어나 밥 먹고 물 마시고 다시 수백 명하고 잤을 동안 죽었으면 물통이 되었을 갈까 말까 머뭇거리는 동안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어제는 등기우편을 찾으러 갔다 집으로 두 번 방문했다가 사람이 없어서 우체국에서 보관하고 있다나 뭐라나 아는 ..
2020.07.30 -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도시의 군중 속으로 나는 사라진다 이렇게 눈비가 한꺼번에 올 때 우산을 세우고 천천히 걷는다 나에게는 즐거워할 일과 돌아버릴 일이 동시에 왔고 사건에 묻어 사건들이 들이닥쳤으며 친구들은 패거리로 몰려왔다가 떠났다 한쪽 눈썹을 치켜들려면 다른 눈썹도 들린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소파를 바로잡은 후 내 등에 쏟았던 정액을 닦아내고 간지러워하며 내가 팬티를 추켜올리려는 순간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남자 친구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의 새어머니가 내게 고분고분해질 즈음 딸을 내놔라 소리치며 죽었던 엄마가 살아 돌아왔던 식이다 이렇게 동시에 진행되는 일들은 가령 우산을 접을 것인가 세울 것인가 눈이 먼저냐 빗방울이 먼저냐 식의 사소한 번민 속으로 나를 데려간..
2020.07.29 -
김이듬 / 여기 사람 아니죠
김이듬 / 여기 사람 아니죠 북국 해변 아니다 유럽식 전원주택 거리를 걸어 봤다 그는 말했다 텔레비전에 나왔던 유명한 동네죠, 한끼줍쇼, 그 프로 봤어요? 대뜸 문 두드리는 건 무례한 일 아닌가요? 태곳적에서나 가능했을 일인데 텔레비전도 보며 살아야 대화가 된다고 했다 근처에 푸른 얼음 떠다니는 인공 호수가 있었지만 볼수록 이상하고 염세적인 여자라며 여기서 이만 안녕하자고 했다 더 야위고 더 창백한 여자가 서 있다 이상하게 가게 거울들은 수척히 반영한다 어디서 왔어요? 외투를 벗으라 하며 미용사가 물었다 외국에서 자주 듣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데 머리를 자르면 긴 얼굴이 더 길어 보일 거라고 했다 사투리를 쓰면 웃는 사람이 많다 진주 가는 건데, 꼭 지방 내..
2020.06.25 -
김이듬 / 평범한 일생
김이듬 / 평범한 일생 나무에게서 나무 냄새가 난다 유칼립투스와 내가 닿았다 나는 작은 숲을 가졌고 나무는 느리게 자란다 뾰족하고 부드러운 나무는 자기가 공기를 바꾸는 줄 몰랐다 대들보나 재목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꿈은 한층 더 사람으로 살다 죽는 것일까 꽃들이 졌다 이제 층층나무에게서 층층나무 냄새가 나고 나무는 모든 잎사귀로 소리와 향기를 발산한다 가장 무성하고 푸른 시절에 관료들이 왔다 토목공사 현장으로 죽음의 강으로 그루터기를 베어 갔다 전문가란 이들이 숲을 뒤지고 검열해서 오렌지 빛 바다로 군대로 먼 타국으로 싣고 갔다 나는 소멸할 것처럼 작은 숲을 가졌고 내 발목을 심은 곳에 친구의 발목도 있다 너는 말했다 아이도 낳아 보고 늙어서 죽었으면 좋겠어 불타거나 베..
2020.06.25 -
김이듬 / 서머타임
김이듬 / 서머타임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넌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는 내 무릎을 베고 아니, 널 따라하지 않아 왜 남은 날들을 신경 써야 하니 잘하려니까 심장을 멈추고 싶잖아 난 일광을 낭비할 거야 날 낭비할 거야 낮에는 커튼을 치지 많이 걷지 않고 버스에서 곧잘 자 뭘 찾으려고 넌 거기까지 갔었니 내 모닝콜은 거슈인의 자장가 내일 못 일어나도 여름은 살기 좋은 계절 여름은 죽기 좋은 계절 그럴 리 없지만 물고기는 수면 위를 날고 목화는 익어가는데 아빠는 부자 엄마는 멋쟁이 그러니 아가야..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