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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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가위」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 위층의 아이들은 어둠을 모르고 군악대처럼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 이놈의 쥐새끼들 같으니! 막대기로 두드려봤자 천장이 문도 아닌데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을 텐..
2021.06.06 -
김하늘 / 나쁜 꿈
김하늘 / 나쁜 꿈 캄캄한 그 어디에서도 지금 잡은 내 손을 놓지 마. 네가 실재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해. 우린 불편한 영혼을 공유했잖아. 우리는 미래가 닮아있으니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주머니에 늘 수면제를 넣고 다니는 습관까지. 칼자국이 희미해지지 않는 자해의 흔적까지. 유령처럼 하얗고 작은 발가락까지. 비릿하고 나쁜 꿈을 꾸고 나면 온 몸에 개미떼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나쁜 게 뭘까. 좋고 싫은 건 있어도 착하고 나쁜 건 모르겠어. 근데 오늘 우리는 나쁜 꿈속에 버려져 있는 것 같아. 세상에 너하고 나, 둘 뿐인 것 같아. 가위로 우리 둘만 오려내서 여기에 남겨진 것 같아. 이런 게 나쁜 거야? 난 차라리 다행인데. 유서를 쓸 땐 서로 번갈아가면서 쓰자. 네가 ..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