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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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식물적인 죽음 ― 故 김태정 시인을 생각하며
나희덕 / 식물적인 죽음 ― 故 김태정 시인을 생각하며 창으로 빛이 들면 눈동자는 굴광성 식물처럼 감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희미해져갈 때마다 숨소리는 견딜 수 없이 가빠졌다 삶의 수면 위로 뻐끔거리는 일, 병실에는 그녀가 광합성으로 토해놓은 산소들이 투명한 공기방울이 되어 떠다녔다 식물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공기 방울에서는 수레국화 비슷한 냄새가 났다 천천히 시들어가던 그녀가 침대 시트의 문양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빛을 향해 열렸던 눈과 귀가 닫힌 문처럼 고요해졌을 때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도 사물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한 떨기 죽음으로 완성된 그녀 죽음이 투명해질 때까지 죽음을 길들이느라 남은 힘을 다 써버린 사람 모든 발걸음이 멈추고 멀..
2020.03.01 -
나희덕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나희덕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나희덕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1994)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