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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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사월 비」
쓰다듬거나 모으지 않아도 괜찮아 샌드위치를 반으로 자르고 빠져나온 아보카도를 줍고 들기 남김없이 먹기 손에서 손 아닌 걸 빼 보세요 무엇이 남는지 무엇이 가는지 무엇이 소리치는지 보고 그래도 두세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따뜻해지지도 움켜쥐지도 않기 세계는 이미 한 번 죽은 재료들 열렬하게 포기해 상한 냄새를 좋아해요 전등의 것도 식탁의 것도 아닌 그림자가 손바닥에 떠 있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오늘은 우산을 들고 좋아하는 샌드위치 가게에 갈 거야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갈 거야 이마에 떨어진 빗방울만 믿고 비가 오는구나 작게 뱉어 볼 것 떨지 않아도 좋지만 떨어도 좋다 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 민음사, 2021
2021.08.19 -
김중일 「품」
변변히 내세울 만한 원한도 없는 우리 대부분의 귀신들은 무일푼으로 구천에 남아 있습니다. 혈관 속을 이백쯤으로 확 내달릴 만한 압력. 생전 그런 건 없었어요. 뭔가 약간씩 부족했죠 뭔가가…… 기쁨도 고통도. 그것이 명부로 가는 티켓 마일리지 같은 것인데 말이죠. 살아생전 정신적 노동에 대한 댓가라고 할까요. 이상한 냄새였어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이한 신음 같은 그런 냄새였어요. 어쩐지 냄새에 가까운 소리였는데, 굳이 얘기한다면 오래된 사체를 태우는 듯한, 쥐어짜는 듯한. 그때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죠. 그냥 한번쯤 나를 맛보고 싶을 때, 가만히 혀를 빼어물고 액셀을 끝까지 밟고 있으면 차내에 가득 차오르던 핏빛 적막에 휩싸여. 그때가 아마 백팔십쯤 됐을까요. 시간을 거스르기 시작하는 속도..
2021.01.28 -
최현우 / 오늘
최현우 / 오늘 물을 붓고 자라는 일들을 지켜본다 대기에 비린 냄새 섞일 때 내가 잘라버린 너를 생각한다 이제 사라져도 좋을, 나도 떠나고 너도 떠난 우리의 지난 일들이 녹고 부풀 때 우리는 꿈결 속에서 장미보다 가시로 자라길 원한다 덜컥 걸린 눈물과 비명이 살인을 닮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을 철 지난 노래라 하자 잊기 위해 두고 왔는데 두고 와서 잊을 수 없게 된, 거기서, 우리의 모든 창문을 타고 또다시 미끄러져내려올 때 그게 너와 나의 한때, 소나기라고 하자 그리하여 이곳이다 네가 너를 버린 실종의 곳간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는 소음을 들으며 여전히 숨어 잠이 드는 최현우 / 오늘 (최현우,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https://www.insta..
202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