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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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 목도리
박성우 / 목도리 뜨개질 목도리를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왠지 애인이 등 뒤에서 내 목을 감아올 것만 같아 생각이 깊어지면,애인은 어느새 내 등을 안고 있다 가늘고 긴 팔을 뻗어 내 목을 감고는 얼굴을 비벼온다 사랑해, 가늘고 낮은 목소리로 귓불에 입김을 불어넣어온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뜨개질했을 밤들을 생각한다 일터에서 몰래 뜨다가 걸려 혼줄이 났다는 말을 떠올리며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그냥 하나 사면 될걸 가지구,라고 나는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가는 내 목에 감겨 있는 목도리는 헤어진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것이라는 것에서 생각을 멈춘다 애인도 손을 풀고는 사라진다 박성우 / 목도리 (박성우, 가뜬한 잠,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
2020.02.29 -
도종환 / 스물몇살의 겨울
도종환 / 스물몇살의 겨울 나는 바람이 좋다고 했고 너는 에디뜨 삐아프가 좋다고 했다 나는 억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늦가을 강가로 가자고 했고 너는 바이올린 소리 옆에 있자고 했다 비루하고 저주받은 내 운명 때문에 밤은 깊어가고 너는 그 어둠을 목도리처럼 칭칭 감고 내 그림자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너는 카바이드 불빛 아래 불행한 가계를 내려놓고 싶어 했고 나는 독한 술을 마셨다 너는 올해도 또 낙엽이 진다고 했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발로 걷어찼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너는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사랑보다 더 지독한 형벌은 없어서 낡은 소파에서 너는 새우잠을 자고 나는 딱딱하게 굳은 붓끝을 물에 적시며 울었다 내가 너를 버리려 해도..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