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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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다 / 이명
양안다 / 이명 밤이 되면 속을 게워내고 두 발이 녹고 네가 보였다 너는 환하게 웃고 있다 '날 사랑하니?' 너의 입모양이 보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너는 너의 존재를 확인하려 자꾸 내게 물었다 너의 입술이 흐려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한낮이었다 너는 사라지고 없는데 어디선가 너의 질문이 계속 들렸다 양안다 / 이명 (양안다,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민음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9 -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6.22 -
안희연 / 파트너
안희연 / 파트너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 손몬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안희연 / 파트너 (안희연, ..
2020.05.30 -
안미옥 / 질의응답
안미옥 / 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안미옥 / 질의응답 (안미옥, 온, 창비, 2017)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4.07 -
차도하 / 침착하게 사랑하기
차도하 / 침착하게 사랑하기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
2020.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