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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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매일 아침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빛기둥 아래 놓인 색색의 유리구슬 갓 낳은 달걀처럼 따뜻한 그것을 한가득 담아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유리구슬을 넣어 빵을 굽는다 빵 하나에 구슬 하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향긋하지 않은 것은 없다 실수로 구슬 하나를 떨어뜨린 날 할아버지께 호되게 혼이 났다 아가야, 저 침묵을 보거라 한 사람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흩어진 유리 조각 틈에서 물고기 한마리가 배를 뒤집고 죽어 있었다 손그릇을 만들어 물고기를 담으니 기린처럼 목이 길어졌다 할아버지,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이에요? 파닥거릴 수 없다는 것은 빛나는 꼬리를 보았다 두 눈엔 심해가 고여 있었다 층층이 빵을 실은 트럭이 지상을 향해 가는 ..
2020.09.02 -
문보영 / 배틀그라운드 ― 사후세계에서 놀기
문보영 / 배틀그라운드 ― 사후세계에서 놀기 도망가는 자는 사방을 닫고 자기 자신을 즐긴다. 즐기다 들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즐긴다. 사망 후 데스캠*으로 본다. 날 죽인 사람의 시점으로 죽기 직전의 나를 보는 건 유익하다. 나는 무너진 건물 창턱에 앉아 있었구나. 그것도 도망이라고. 왜 죽였는지는 묻지 말고 어떻게 죽였는지만 배우면 된다. 저렇게 먼데 죽였다고? 배율의 문제. 너무 멀잖아. 부조리해. 핵쟁이의 짓인가. 나는 도망치고 있구나. 문을 놔두고 창문을 타고 드나들면 열심히 사는 기분이 들었거든. 원에 대한 악감정은 없지만 다른 데 봤다. 연약함을 처리해야 할 때. 멀리 있는 사람은 아름답고 밋밋해. 밤은 기장이 길고 나는 인간에게 익숙하지 않은 물건이므로 잠시 일그러진다. 먼 거리에 ..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