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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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 여우계단
서대경 / 여우계단 여우계단 꿈에서 밝은 허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잿빛의 높은 담벽들이 골목 양편으로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검은 쥐들이 일렬로 벽 위를 기어갑니다 나는 담벽에 매달려 저편에 서 있는 못 보던 공장들과 못 보던 아버지들을 봅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버지는 목장갑을 벗고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뭅니다 공장 앞으로 흑백의 강이 흘러갑니다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개들이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짖어댑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릴 적 동화에서 보았던 작은 여우가 보였습니다 여우는 계단 한쪽 구석에서 빙빙 맴을 돕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여우는 은은히 빛납니다 속삭임이 퍼지고 여우의 율동이 밝..
2020.11.29 -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 흡혈귀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인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서대경 / 흡혈귀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7 -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雲)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서대경 / 벽장 속의 연서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