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 스물몇살의 겨울
도종환 / 스물몇살의 겨울 나는 바람이 좋다고 했고 너는 에디뜨 삐아프가 좋다고 했다 나는 억새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늦가을 강가로 가자고 했고 너는 바이올린 소리 옆에 있자고 했다 비루하고 저주받은 내 운명 때문에 밤은 깊어가고 너는 그 어둠을 목도리처럼 칭칭 감고 내 그림자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너는 카바이드 불빛 아래 불행한 가계를 내려놓고 싶어 했고 나는 독한 술을 마셨다 너는 올해도 또 낙엽이 진다고 했고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발로 걷어찼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너는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우리는 왜 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사랑보다 더 지독한 형벌은 없어서 낡은 소파에서 너는 새우잠을 자고 나는 딱딱하게 굳은 붓끝을 물에 적시며 울었다 내가 너를 버리려 해도..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