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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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
2021.06.29 -
차원선 「유실수(有實樹)」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2021 한..
2021.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