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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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잊다 잊어버리자 잊혀지거나 등등」
고유의 방식으로 꿈은 형태를 지운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지우개로 지우는 것과 다르게 아무데서나 지우고 싶은 것부터 지운다 깨끗하게는 아니고 주변을 쓱쓱 뭉텅뭉텅 어떤 부분은 둥근 빵덩어리로 보이다 만지려 하면 밀가루처럼 아늑해져서 모양이 참 막연해져서 무엇이었더라 말할 수 없게 한다 어떤 수업을 들었는데 어떤 칭찬을 받았는데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뭐였더라 그것은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희미함 무게도 감촉도 없지만 분명 거기 있는 알갱이들 나는 안개로 건물을 짓고 지붕을 뚫은 철근을 보고 낙서가 적힌 흑판을 본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과 일을 하다 싸움이 나고 또 금방 화해한다 맥락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과 내기를 하고 나는 지략을 세워 크게 승리한다 다만 칭찬이 무엇의 결과였는지 명확치 않다 2021 광주일보..
2021.02.17 -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젖은 솜으로 기운 외투를 덮고 잠드는 나날이었다 몸 안의 물기를 모두 공중으로 흩뿌리고서야 닿을 수 있는 탁한 피의 거처가 있다 내 속을 헤엄치던 이는 순간의 바다로 흘러갔다 젖어들고 나서야 문장의 끝이 만져지는 기이한 세계 굳어버린 혀에 안개가 서리면 입속은 수레국화를 머금은 듯 자욱해진다 어깨를 털어내는 새의 깃털 속에서 계절은 문득 오랜 미신이 되었다 이혜미 / 습기의 나날 (이혜미, 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28 -
이장욱 / 뼈가 있는 자화상
이장욱 / 뼈가 있는 자화상 오늘은 안개 속에서 뼈가 만져졌다 뼈가 자라났다 머리카락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 희미한 경비실이 되자 겨울이 오고 외로운 시선이 생겨났다 나는 단순한 인생을 좋아한다 이목구비는 없어도 좋다 이런 밤에는 거미들을 위해 더 길고 침착한 영혼이 필요해 그것은 오각형의 방인지도 모르고 막 지하로 돌아간 양서류의 생각 같은 것인지도 모르지 또는 먼 곳의 소문들 개들에게는 겨울 내내 선입견이 없었다 은행원들도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덜 존재하는 밤, 안개 속에서 뼈들이 꿈틀거린다 처음 보는 얼굴이 떠오른다 이장욱 / 뼈가 있는 자화상 (이장욱, 생년월일, 창비,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