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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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학 / 데미안
윤성학 / 데미안 시간은 알을 깨고 나온다 가스레인지 모서리에 계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을 깨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자신이 낳은 알을 쪼고 있었다 琢탁琢탁 계란이 가장 맛있는 프라이로 되는 시간은 2분이며 세상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이분법이지 헷세가 탁자 위에 계란을 돌리며 말했다 돌던 계란을 잡았다가 놓았을 때 그대로 탁, 멈추면 삶은 알 멈추는 듯 다시 돌기 시작하면 날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가 슬픈 것은 관성 때문이었어 헤, 헷, 헷세가 말을 더듬었던 것도 같은데 관성이 삶에 작용한다는 것은 그 삶이 삶겨지지 않은 까닭이므로 젊은 시인이 슬픈 것은 관성 때문이 아니라 네가 가진 계란은 죽었니 살았니 묻는 이분법 어느 날부턴가 누군가 묻지 않아도 그 물음이..
2020.03.01 -
안도현 / 스며드는 것
안도현 / 스며드는 것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 스며드는 것 (안도현,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200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7 -
김희준 / 생경한 얼굴
김희준 / 생경한 얼굴 따라와 바다를 지나면 골목이 나올 거야 왼쪽으로 돌거나 두 블록 먼저 꺾거나 아무튼 전등이 축축하게 켜질 때 첫 번째로 보이는 여관 말이야 거기서 혼자가 아닌 우리였던 적이 있어 비린내 나는 이야기지만 바다가 고요해지고 달이 차오르면 낯선 냄새로 북적이는 그 동네 말이야 여관 방 벽지에 낙엽이 말라가고 그리움이 천장까지 닿을 때 우리는 버석버석한 섹스를 나누었지 그날 우리는 시소를 탔어 갈망의 무게만큼 발돋움이 심했던가 나는 언제나 낮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너는 모래에 발이 패인다고 투덜거렸지 돌아온 방안에서 우리는 양말을 뒤집어 조개를 찾거나 퇴적층 겹겹이 냄새를 말렸어 몰래 배가 부풀기를 기다렸던 것 같아 내 몸에 쌓이는 게 모래나 바다라면 잠든 네 발로 내 속..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