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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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미시령」
몇 개의 터널을 지나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 아버지는 평생을 걸어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눈 덮인 도로에 다리를 끌며 아버지는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참을 찾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여기가 어딘지 언제인 것인지 아버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방금 네 엄마를 묻었다 일찍 왔으면 너도 도왔을 것을 아버지는 곱은 손을 내밀어 헤드라이트에 스치는 눈발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아버지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나는 손을 뻗어 김이 서린 유리를 닦았다. 무엇이든 잊지 않으면 너도 나와 같이 되고 말 거다 아버지의 눈꺼풀은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계속 너에게 계속 연락한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너는 혼자 생겨난 것처럼 살고 있더구나 아버지의..
2021.01.13 -
박태일 / 생배노 몽골
박태일 / 생배노 몽골 1 참새를 발아래 기르던 버드나무 잘라져 보이질 않고 문 또한 남쪽으로 바꿔 낸 기숙사 복도 끝 304호 늦은 시각 구두를 신은 채 머리를 감는다 낡은 텔레비전은 모르는 채널 위를 오가며 어느 먼 데 소식을 양털 무더기인 양 날린다 창을 열고 묵은 방냄새를 내보낸다 앞길에 세워둔 차가 양 같다 오늘 하루 산으로 들로 다닌 뒤 잠자리에 드는 양 뒷보기유리를 깨뜨려 아양아양 우는 어린 놈도 보인다. 2 며칠 비에 넘치는 황톳물 쑥대 무성한 셀브 강 흘러간다 벅뜨항 산 비알에 희게 돌로 새겨놓았던 청기스항 얼굴도 흩어져내린다 내가 알았던 처녀 둘은 학교를 그만둔 뒤 멀리 호숫가 선교사로 떠났다 중앙우체국 담벼락 헌책방 주인 바씅은 흰머리에 허리가 무거워 눕혀둔 헌책처럼 앉..
2020.07.23 -
문현식 / 비밀번호
문현식 / 비밀번호 우리 집 비밀번호 □□□□□□□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 □□□□는 엄마 □□ □□□ □□는 아빠 □□□□ □□□는 누나 할머니는 □ □ □ □ □ □ □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문현식 / 비밀번호 (문현식, 팝콘 교실, 창비,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1 -
고영민 / 철심
고영민 / 철심 유골을 받으러 식구들은 수골실로 모였다 철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쇄사가 물었다 오빠 어릴 때 경운기에서 떨어져 다리 수술했잖아, 엄마 엄마 또 운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분쇄사는 천천히 철심을 골라냈다 고영민 / 철심 (고영민, 봄의 정치, 창비,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