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5)
-
조연호 / 여름
조연호 / 여름 낭떠러지의 여름이다 여름마다 여름을 뒤돌아보는 것이 피곤했지 나를 그네라고 부르는 사람은 머리를 사슬로 감아주자 여름마다 자기를 흔들어도 좋다고 말했다 추락하는 여름이다 팔다리가 달린 검정과 놀았지만 혼자서 했던 연애 나도 허공이었던 것을 너만큼 변심으로 내 발등에 엎지를 줄 안다 천박한 짓을, 자아보다 못한 짓을 땀샘과 모공으로 채우며 지금은 덩굴손이 붙잡는 것을 윤회의 크기라고 생각하며 네가 흔든 것을 내가 흔들렸던 것으로 비교하는 멍청한 짓을 하며 너를 잊고 있다 조연호 / 여름 (조연호, 천문, 창비, 201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04 -
조연호 / 배교
조연호 / 배교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만약 불타는 숲 앞이었다면 여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 소년병은 투구를 안고 있었고 그건 두개골만큼이나 소중하고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봐 눈을 감는다 나는 벌레 먹은 잎의 가장 황홀한 부분이다 조연호 / 배교 (조연호, 천문, 창비, 2010)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6.11 -
안미옥 / 질의응답
안미옥 / 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안미옥 / 질의응답 (안미옥, 온, 창비, 2017)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4.07 -
석지연 / 우리가 네가 아니었을 때
석지연 / 우리가 네가 아니었을 때 비는 약속 없이 오기로 한다 심장박동처럼 폭우가 쏟아지자 처음으로 나는 안녕을 묻는다 그곳의 여름은 마음에 드니? 나는 네 이름을 마주하기 위해 내 슬픔을 소모할 거야 새를 추방하는 나뭇가지를 이야기할 때 네가 앉아 있는 곳은 뒤바뀐 나의 배경이다 꽃잎은 오래 젖어 차창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 한때 우리가 있었는데 우산들이 한꺼번에 펴지자 너는 보이지 않는다 내 왼편 어깨 위 빗방울은 네 오른편 어깨의 자국과 같은 것 심장은 멈추지 않고 우산은 매일 챙기기로 한다 이곳의 여름은 네가 부재하므로 써진다 너는 안다 우리를 지우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남는다는 것을 석지연 / 우리가 네가 아니었을 때 (편집부, 시와 미학 가을호, 가림토, 2013) h..
2020.03.02 -
안태운 / 피서
안태운 / 피서 마찰하는 것에는 보풀이 일었다 자주 스위치를 껐다 켰고 비누에는 균열이 생겼다 비나 내렸으면 그러나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파이프는 계속 삐 소리를 냈고 하늘에는 버짐이 피어나고 있었다 너는 비틀어진 선로였다 그러니 이탈할 것 여러 번 다짐을 했고 면벽했다 여분의 무게로 나무는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자주 간섭했고 그러나 그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출구가 전환되고 있었다 청과점 앞에는 아지랑이가 오래 정체했다 네 동공은 우주 같았고 그러나 빈 우주에서 나는 독백하는 배역을 맡았다 또 한 편의 여름이 재생되었다 나는 일상을 적지 않았다 안태운 / 피서 (안태운, 감은 눈이 내 얼굴을, 민음사,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