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신 「베이스캠프」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염소 발목을 부러트려 십자가를 만들었다 우리는 눈보라의 어디쯤을 짚어보고 있을까 난로 위에서는 물이 끓고 나는 네가 기타 가방에 그려놓은 동물이 오길 기다렸다 뿔과 날개가 있고 다리가 없는 그 동물, 우리의 얼굴이 반반 섞여 있는 그 동물 내가 위태로울 때면 너는 따듯한 술잔을 들고 꿈에 나타났다 우리는 머나먼 바다까지 흘러가기도 하고 사냥당한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별을 바라보곤 했다 침낭 지퍼를 머리끝까지 잠그고 죽음의 두께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먼저 갔듯이 눈발은 발자국을 오래 남기지 않는다 기도를 하다가 멈추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정우신,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2021.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