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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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혁 「19」
응, 이젠 잊어야지. 온갖 음탕한 말을 하며 너를 만질 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네가 내게 배설 욕구를 스스럼없이 얘기할 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이별 후의 연서는 리벤지 포르노 같은 데가 있다. 우기에 나는, 언젠가 네가 내 손에 쥐여 준 보랏빛 낡은 우산만을 아직도 꼭 들고 다니네. 거친 비라도 쏟아지면, 그 우산 속에서 나는 줄줄 새는 비를 다 맞고 서 있네. 응, 이젠 잊어야지. 하는 거 봐서. 박민혁,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 2021
2021.03.25 -
김병언 / 조현병의 풍경
김병언 / 조현병의 풍경 흘러내리는 안경을 치켜든다 먹구름이 자꾸 손찌검을 한다 안경이 다시 흘러내리고 뿌옇게 번진 빌딩들이 중얼거린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나를 내리깔기에 바쁘다 우산을 쓴 광대들이 히죽거린다 이젠 그 웃음이 오싹하기까지 하다 오늘따라 바람이 적대적이다 떨리는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니 옅어져, 어쩌면 멈췄을 심장을 비틀대는 몸으로 실컷 때려댄다 채앵- 채앵- 챙- 귓가에 풍경소리가 울린다 아직도 히죽대는 것을 보니 저들은 들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전히 나는 저 구슬픈 소리를 나는 듣고 있다 새들의 젖은 지저귐과 채앵- 채앵- 챙- 분명하게 들리는 평온한 울음소리를 김병언 / 조현병의 풍경 (편집부, 시사문단 9월호, 시사문단, 2020) https://www.i..
2020.12.10 -
조율 /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조율 /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이를테면 공동묘지 어떤 무덤이나, 오단 서랍장 세 번째 수납 칸 되어, 혹은 비켜간 채널 되어 이제껏 비가 왔던 모든 날들을 수납한다 욱여넣을 문갑 한 칸 찾을 수 없다 당분간 엄마가 아침 드라마를 괜히 끊는다 햇볕 찾아오는 어느 날 가사까지 지어올 리 없다 오늘을 오늘처럼 사는 처세술서 한 권쯤 갈아 마셔야 가늘게 산다 마르지 않은 수많은 어제들 말리느라 건조해져 어제조차 건너올 수 없다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이제부터 당신은 모르는 사람 어제를 닮은 키 큰 플라타너스 마른 잎사귀를 한 걸음 밟는데 부스러기 섬들 다시 돋아나는데 펄펄 우는 폭우에 펼쳐질 나는 무지갯빛 우산, 아직 펑펑 젖은 무덤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사람은 오는..
2020.11.15 -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도시의 군중 속으로 나는 사라진다 이렇게 눈비가 한꺼번에 올 때 우산을 세우고 천천히 걷는다 나에게는 즐거워할 일과 돌아버릴 일이 동시에 왔고 사건에 묻어 사건들이 들이닥쳤으며 친구들은 패거리로 몰려왔다가 떠났다 한쪽 눈썹을 치켜들려면 다른 눈썹도 들린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소파를 바로잡은 후 내 등에 쏟았던 정액을 닦아내고 간지러워하며 내가 팬티를 추켜올리려는 순간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남자 친구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의 새어머니가 내게 고분고분해질 즈음 딸을 내놔라 소리치며 죽었던 엄마가 살아 돌아왔던 식이다 이렇게 동시에 진행되는 일들은 가령 우산을 접을 것인가 세울 것인가 눈이 먼저냐 빗방울이 먼저냐 식의 사소한 번민 속으로 나를 데려간..
2020.07.29 -
이소호 / 밤섬
이소호 / 밤섬 물어뜯긴 손톱이 비로소 마음을 들켰다 빗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우산에서 쫒겨난 어깨처럼 젖어 있었다 이소호 / 밤섬 (이소호, 캣콜링, 민음사, 2018)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