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4)
-
전윤호 / 유실물 보관소
전윤호 / 유실물 보관소 그 이름을 잃어 버렸다 못 잊을 줄 알았는데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는다 우주에 사라지는 건 없어서 여기 아니면 다른 데 나타난다는데 당신은 누구의 뜰에 꽃피었을까 어느 햇볕 어떤 바람에 허리를 살랑이며 웃고 있을까 지붕을 두들기는 소낙비 나는 어디서 잃어버린 누구의 애인일까 전윤호 / 유실물 보관소 (전윤호, 천사들의 나라, 파란, 2016)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8.26 -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창문이 흰 계절이 온다 몸을 열자 동백나무 우거진 숲 당신이라는 검푸른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한 발의 총성 산산히 깨진 당신을 밟고 맨발로 당신이라는 시간을 걷는다 땀구멍마다 침투하는 당신의 쇳소리가 밤마다 내 몸을 흔든다 모가지째 뚝뚝 당신이 순교한다 나는 가장 벙글지 않은 당신을 주워 탁자 위 꽃병에 꽂는다 이미 죽은 당신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시시각각 피어나며 시드는 당신이라는, 붉은, 짙은, 어지러운, 너덜너덜한 꿈의 자락을 들어 냄새를 맡으면 곧 자욱한 눈보라 으스스한 핏빛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계절 창문이 흰 계절 위에 손가락으로 당신을 쓴다 가장자리부터 얼어붙는 이름을 쓴다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안개주의보, 문학과지성사, ..
2020.08.18 -
오은 / 아이디어
오은 / 아이디어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발아가 이루어지면 한 포기 난초와 한 떨기 장미로 피어난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때때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그것들을 잡기도 하지 커피의 김과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커서는 껌벅거리며 최면을 걸고 은밀하게 시작되는 한낮의 점성술 우리는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기다려 우리의 동공이, 우리의 동맥이 현장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려 때때로 빛이 너무 커다래서 우리는 터질 듯 벅차올라 땅에 꽂히는 일도 있겠지 바르르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마지막 남은 한 줄기 빛을 울컥 토해내겠지 한 줄기 빛은 한 줄기 빛 땅 위로 봉긋 더욱 또렷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원음보다 선명한 메아리처럼 우리는 분위기를 장악..
2020.03.18 -
유계영 / 대관람차
유계영 / 대관람차 가방 속에 하나 이상의 거울을 넣어가지고 다녔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줄곧 웅크렸던 귀가 툭 풀어질 것 같다 귓불에 살점이 붙던 시간은 왜 기억나지 않을까 바람이 태어난다고 믿게 되는 장소 부드러운 거절을 위해 빼곡이 심어놓은 나무들 세상의 모든 미로는 인간의 귀를 참조했다 누구도 자신의 귀를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뭐라고? 미로 속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이 메아리와 같이 희미해지네 거울의 내부에는 가방의 내부가 있고 바람의 내부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매달린다는 것은 동심원의 가장 먼 주름으로 사는 것 막다른 벽이라 생각하세요 결국 빠져나갈 거라면 최대한 긴 과정을 출구 앞에 펼쳐놓을 것입니다 귓속에 이름이 쌓여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내 이름을..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