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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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주 「낭독회」
어두운 방에서 그가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촛불이 어둠을 낫게 할 수 있나요? 어둠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촛불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눈부셨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며 왼쪽에서 오른쪽 페이지를 읽어나갔다. 우기를 견디는 나무가 다 뽑혀 나가지 않은 것을 일종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를 견디는 어둠이 다 휩쓸려 나가지 않은 것을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은 엉키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풀어지지 않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손바닥과 손바닥이 겹치고 또 겹치다가 빈틈없이 메워지는 마음이 된다면 그것이 어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형태가 남아 있던 손이 몰래..
2022.01.17 -
이민하 「가위」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 위층의 아이들은 어둠을 모르고 군악대처럼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 이놈의 쥐새끼들 같으니! 막대기로 두드려봤자 천장이 문도 아닌데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을 텐..
2021.06.06 -
김하늘 / 상실의 시대
김하늘 / 상실의 시대 너의 앙가슴이 너무 추워서 나는, 나도 모르는 외계어로 너를 애무한다 침대 위의 너와 나, 고양이들, 재떨이, 검은 브래지어 한 번 더 서로의 혀를 꼬며 우리의 낡은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 입술이 뱉는 밀어가 수북이 쌓이면 수증기를 통과하는 물고기처럼, 너의 분홍색 엉덩이가 흔들린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우리의 언어를 고민해 본다 좀 더 사적인 마음으로 칫솔질을 하는 네가 귀여워서 입가에 묻은 거품을 엄지로 닦아 준다 나의 성기가 왼쪽으로 휘고 있다 욕실 가득 거룩한 촛불들이 술렁인다 상상임신을 한 여자처럼 구역질이 났다 너는 내 등을 가만히 쓸어 주고 불빛들은 우리의 알몸을 희끗희끗 노출하고 나는 따갑게 다시 너를 안는다 우리는 미래를 조금씩 상실해 가며 사랑을 나눴다 ..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