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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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창문이 흰 계절이 온다 몸을 열자 동백나무 우거진 숲 당신이라는 검푸른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한 발의 총성 산산히 깨진 당신을 밟고 맨발로 당신이라는 시간을 걷는다 땀구멍마다 침투하는 당신의 쇳소리가 밤마다 내 몸을 흔든다 모가지째 뚝뚝 당신이 순교한다 나는 가장 벙글지 않은 당신을 주워 탁자 위 꽃병에 꽂는다 이미 죽은 당신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시시각각 피어나며 시드는 당신이라는, 붉은, 짙은, 어지러운, 너덜너덜한 꿈의 자락을 들어 냄새를 맡으면 곧 자욱한 눈보라 으스스한 핏빛 잎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계절 창문이 흰 계절 위에 손가락으로 당신을 쓴다 가장자리부터 얼어붙는 이름을 쓴다 이용임 / 연애의 시간 (이용임, 안개주의보, 문학과지성사, ..
2020.08.18 -
김지민 / 머나먼 교전
김지민 / 머나먼 교전 고구마를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화먼 속에 건물 잔해가 나뒹군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다 미처 피하지 못해 연기 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있다 들것에 실려 화면 밖으로 벗어나는 사람이 있다 붉은 모자이크를 덮고 일렬로 누운 사람들이 있다 새까만 발바닥과 발바닥 입안에서 고구마가 굴러다닌다 당장의 고구마 나에게 닥친 고구마 입안에서 벌어지는 고구마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게 달려드는 고구마 어찌할 도리 없이 달고 뜨거운 고구마 정말 큰일이야 어쩌면 좋아 나는 고구마를 피해 달아나다가 고구마를 살살 달래보다가 고구마를 이로 잘게 부수면 불타는 시가지를 바라보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며 손을 뻗는다 잡아달라는 듯이 잡아보라는 듯이 화면은 좌우..
2020.06.12 -
기형도 / 대학시절
기형도 /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변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 대학 시절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