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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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안개와 묘비명과」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추억에게 그 계절들과 그 골목이 있다. 흘러가도 흘러가도 두려운 것은 너를 잃은 내가 고작 나이기 때문이다. 아직 사진이 없었을 적에는 인간의 추억이 이 지경까진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궁리해 본다 한들 타인보다 낯선 것이 내 뒷모습이다. 묘비명은 단 두 줄. 하루는 지나갔다. 인생은 지루했다. 이응준, 애인, 민음사, 2012
2021.01.04 -
허연 / FILM 2
허연 / FILM 2 신은 추억을 선물했고 우리는 근본이 불분명한 젤리를 씹으며 참 많은 것을 용서했다 가끔씩 어떤 끔찍함이 탄환처럼 빠르게 삶을 관통하고 지나갔지만 뜨거움은 그때뿐이었다 탄환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다 태생적인 방관자들이 부러웠고 느티나무의 실어증이 부러웠다 그날그날의 슬픈 방을 찾아들어가며 우리는 울고 있었다 눈이 내렸다 수만 년 전 조상들이 이러했을까 그들도 눈을 맞으며 울었을까 아무것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밤새 울었다 따뜻한 오줌을 누며 방점을 찍듯 깜빡이는 가로등에 기대 느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십만 년 동안 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밤새 눈은 연옥을 덮고 있었다 허연 / FILM 2 (허연,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20..
2020.12.31 -
허연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허연 /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은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을 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 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허연 / 북회..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