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3)
-
김중일 「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
뉴스속보가 거실 한쪽에서 왕왕거리고 저녁식사 중인 엄마는 다몽증 환자 꾸벅꾸벅 잠결에 내 잠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거대한 태풍 '불면'이 1899년 이후 니이가따현 쪽으로 하루에 일 센티미터씩 북상 중이다 북상 중인 달팽이…… 태풍의 이동경로를 따라 장거리주자인 나는 불면의 중심에 가건물로 세워진 재해대책본부가 있는 결승점을 향해 오늘 밤도 달리는 중이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이봐, 힘들게 너는 왜 하필 지금 잠을 청하려 하지? 오늘 밤엔 재밌는 일도 많은데 나는 적요한 불면의 눈을 향해 줄곧 달리는 중이다 나는 돌풍이 휘몰아치는 불면 속에서 팥죽 같은 잠을 뚝뚝 흘린다 길가의 창문을 티슈처럼 뽑아 모공 속에서 줄줄이 기어나오는 잠을 닦는다 작고 끈적하고 더운 뱀…… 순간 지진으로 땅이 길게 ..
2021.07.15 -
최지인 / 죄책감
최지인 / 죄책감 너와 손잡고 누워 있을 때 나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수면 위로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빛바랜 벽지를 뜯어내면 더 빛바랜 벽지가 있었다 선미船尾에 선 네가 사라질까 봐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컹컹 짖는 개를 잠들 때까지 쓰다듬고 종이 상자에서 곰팡이 핀 귤을 골라내며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기도했었다 고요했다 태풍이 온다던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최지인 / 죄책감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아침달,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11.18 -
전윤호 / 수몰지구
전윤호 / 수몰지구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 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전윤호 / 수몰지구 (전윤호,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 2019)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