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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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가위」
어떤 날에 우리는 철없이 병이 깊었다 일요일인데 얘들아, 어디 가니? 머리에 불이 나요 불볕이 튀는데 없는 약국을 헤매고 창가에는 화분이 늘었다 좋은 기억을 기르자꾸나 머리카락이 쑥쑥 자라고 눈 코 입이 만개할 때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생크림을 발라줄게 촛불을 끄렴 나쁜 기억의 수만큼 전쟁을 줄입시다 담배를 줄이듯 징집되는 소녀들은 머리에 가득 초를 꽂고 꿈자리에 숨어도 매일 끌려가는데 우리의 무기는 핸드메이드 페이퍼에 혼잣말을 말아 피우는 저녁 사는 게 장난 아닌데 끊을 수 있나 몸값 대신 오르는 건 혈압뿐이구나 위층의 아이들은 어둠을 모르고 군악대처럼 삑삑거리는 리코더 소리 이놈의 쥐새끼들 같으니! 막대기로 두드려봤자 천장이 문도 아닌데 입구가 없으면 출구도 없을 텐..
2021.06.06 -
양안다 / 진단
양안다 / 진단 토할 때까지 음식을 구겨 넣지 마세요, 술을 줄이세요, 담배를 피웁니까, 가족과는 화목하군요, 애인이 있습니까,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때요, 어렵진 않나요, 극단적인가요, 왜 죽고 싶습니까, ……모르겠다고 했어 죽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이유를 말하라면 더 모르겠고 그걸 확인하려고 그곳에 갔었어 그날은 오래 걸었지 모르는 길을 걸으면 모르는 장소가 생기고 정서가 생기는데 어떤 이름이 붙여야 할까 넌 알아? 멀리 걸어서 먼 곳까지 갔다는 너는 정답을 알아? 나는 종종 공원에 앉아 바닥을 쪼는 새들이 날아오르길 기다린다 일제히 날아오르는 광경, 너와 함께 본다면 좋을 텐데 네가 내 손을 잡던 때를 기억한다 어깨를 감싸고 괜찮아 긴장하지 마, 그런 목소리가..
2020.11.29 -
최지인 / 기다리는 사람
최지인 / 기다리는 사람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등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
2020.11.18 -
진은영 / 가족
진은영 / 가족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 / 가족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