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 14:07ㆍ同僚愛
류시화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1
달 표면 오른쪽으로 거미가 기어간다
월식의 흰 이마 쪽으로
어느 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밤늦은 시각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흰 빗금을 그으며
산목련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거미가 달의 뒷면으로 사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텅 비고 깊고 버려진 목소리
망각의 정원에 핀 환영의 꽃 같고
육체를 이탈한 새의 영혼 같고
얼마큼의 광기 같은
당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전화는 연결 상태가 좋지 않다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요?
당신 아직 거기 있어요?
2
지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매화는 피었나요 소복이
삼월의 마지막 눈도 내렸나요 지난번
가시에 찔린 상처는 아물었나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꽃은
눈꽃이니까
천상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그곳에도 매화가 피었나요 촉촉이
초봄의 매우도 내렸나요 혹시
육체를 잃어서 슬픈가요
그 꽃가지 꺾지 말아요
아무리 신비하기로
그 꽃은
환생의 꽃이니
3
어느 날 너는 경계선 밖에서 전화를 걸 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幻 속에서
이미 재가 되어 버린 손가락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네가 있는 여기
봄 그리고 끝없이 얼굴을 바꾸며
너와 함께 이동해 준 여러 번의 계절들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 기억들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
어느 날 갑자기 너는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질문과 회피로 일관하던 삶을 떠나
이미 떨어진 산목련 꽃잎들 위에
또 한 장의 꽃잎이 떨어지듯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들에
또 하나의 생을 보태며
류시화 / 바르도에서 걸려 온 수신자 부담 전화
* 바르도 - '둘 사이'라는 뜻의 티베트 어로, 사람이 죽어 일정 기간 머무는 곳
** 매우(梅雨) - 매화 질 때 내리는 비
(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숲,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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