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2020. 7. 29. 21:18同僚愛/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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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도시의 군중 속으로 나는 사라진다

이렇게 눈비가 한꺼번에 올 때

우산을 세우고 천천히 걷는다

나에게는 즐거워할 일과 돌아버릴 일이 동시에 왔고

사건에 묻어 사건들이 들이닥쳤으며

친구들은 패거리로 몰려왔다가 떠났다

한쪽 눈썹을 치켜들려면 다른 눈썹도 들린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소파를 바로잡은 후

내 등에 쏟았던 정액을 닦아내고

간지러워하며 내가 팬티를 추켜올리려는 순간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남자 친구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의 새어머니가 내게 고분고분해질 즈음

딸을 내놔라 소리치며 죽었던 엄마가

살아 돌아왔던 식이다

이렇게 동시에 진행되는 일들은

가령 우산을 접을 것인가 세울 것인가

눈이 먼저냐 빗방울이 먼저냐 식의

사소한 번민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나는 도시의 우울한 군중 속으로 간다

헤드폰을 꺼내 귀마개 용도로 끼운 채

 

 

 

김이듬 / 동시에 모두가 왔다

(김이듬,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2011)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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