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 계피의 맛
2020. 11. 16. 10:45ㆍ同僚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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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계피의 맛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며 너를 생각한다
몇 마리의 개가 거리 끝에서 거리 끝으로 달려간다
아네모네라는 말이 좋아 아네모네 꽃이 좋았다
손목시계는 손목에서 천천히 낡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이고 화요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됐던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동트는 새벽의 닭 울음 같은 것이 듣고 싶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하면서 우는 희고 큰 닭
이제 죽고 싶지는 않니 하면서 우는 희고 큰 닭
꿈속에 두고 온 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꿈속으로 가려면 나는 조금 늙어야만 한다
얼마간의 잠이 필요하고 얼마간의 망각이 필요하다
지난밤 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계피의 맛
너를 보려고 눈을 감으면 다시 한 번 계피의 맛
몇 개의 창문이 열리고 몇 개의 꽃이 떨어진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죽어가는 몇 개의 손과 발
수요일은 희미해지고 기억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오늘의 기억은 내일 또다시 정교하게 수정된다
화요일은 지나간 토요일과 수요일 사이에 있다
잠에서 깼을 때 내 두 손은 꼭 쥐여 있었다
두 손 가득 계피와 계피를 쥐고 있는 것처럼
고양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골목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오래전 얼룩 하나가 천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이제니 / 계피의 맛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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