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 / 북극 거미

2020. 3. 1. 17:59同僚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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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 북극 거미

사과가 붉은 것은 햇볕의 농담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 손은 순록의 뿔이 된다

다 안다는 듯 아이가 물방울처럼 웃는다

전화번호를 지우고 주소를 지우고 마지막 저녁의 표정도 지운다

새롭게 얼굴을 내민 아침의 각도가 거미줄에 걸려 있다 거미줄에서 부서지던 햇살들이 폭설로 흩날리는 밤에 나는 공중의 혈맥을 더듬던 금빛 거미를 찾는다

어제 살았던 아침을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씻어내다가 어느덧 나는 국경 밖의 눈보라가 된다 열두 시간 전에 이국의 골목에서 듣던 눈썹 흰 노래였다

사라진 손으로 귀에 도착하지 않은 북극의 물소리를 만지는 밤

툰트라의 측백나무로 서서 여자의 몸에서 자라는 달을 본다

나는 들개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의 중심에서 밤을 포획하는 금빛 거미를 찾는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손을 잡고 눈 먼 남자가 천천히 걸어온다 검은 남자의 수세기를 지나 베링해의 어두운 해안에 닿는 저녁

내 안의 거미가 긴 다리를 뻗어 얼음 같은 그믐달을 잘게 씹어 먹는다

 

 

 

홍일표 / 북극 거미

(홍일표, 밀서, 문예중앙, 2015)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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