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안희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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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안희연 / 시간의 손바닥 위에서 "다녀갔어." 그렇게 시작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가 언제랄 것도 없이 덩그러니 다녀갔다는 말은 흰 종이 위에 물방울처럼 놓여 있었고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밖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일기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견하듯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며 문을 닫았다 탁자 위엔 읽다 만 책이 놓여 있고 내가 믿을 것은 차라리 이쪽이라고 여겼다 책을 믿는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독서를 이어갔다 "수잔은 십 년도 더 된 아침 햇살을 떠올리며 잠시 울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된 햇살의 촉감을 상상하느라 손끝이 창백해지는 줄도 모르고 잠시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생각하느라 방..
2020.07.05 -
안희연 / 물속 수도원
안희연 / 물속 수도원 기도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흩어진다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는데 저녁은 죽은 개를 끌고 물속으로 사라지고 목줄에는 그림자만 묶여 있다 개보다 더 개인 것처럼 묶여 있다 그림자의 목덜미를 만지며 물속을 본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 끝엔 낮은 입구를 가진 집 물의 핏줄 같은 골목을 따라 모두들 한곳으로 가고 있다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 나는 그림자에 대고 너는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물 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얼굴은 수초로 가득한 어항 같아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안희연 / 물속 수도원 (안희연, 너..
2020.06.16 -
안희연 / 파트너
안희연 / 파트너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 손몬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안희연 / 파트너 (안희연, ..
2020.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