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僚愛/주하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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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 반달 모양의 보지*
주하림 / 반달 모양의 보지* 1 챙 넓은 모자 검은 모발 희고 커다란 코 입이 귀까지 찢어진 죽음을 보았네 2 경기도에 산다고 했다 넋 나간 목소리 혀 꼬인 발음이 어둠 속에서도 반듯한 나를 더듬더듬 짚어가는데 그러나 언니…… 미안해요 난 벌써 약에 취했어요 도나웨일 노래를 듣고 있어요 mi, ZBC, HYUNGIN25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게 수면제 그러니까 언니…… 대화라는 건 어렵지만 늘 내가 그린 그의 초상화를 가까이 두고 있어요 그가 왼쪽 눈을 감을 때 단숨에 스케치해나갔던, 너는 뭐 때문에 죽고 싶니 외로워 불쌍해? 실연이라 말하면 우리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같이 술을 마시고 포켓볼을 치며 쓸모없는 남자들을 꼬시며 언니……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사는 걸까 3 아니 여전..
2020.12.11 -
주하림 / 몬떼비데오 광장에서
주하림 / 몬떼비데오 광장에서 일요일 아침, 물에 빠져 죽고 싶다는 어린 애인의 품속에서 나는 자꾸 눈을 감았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술집에서 나라 이름 대기 게임을 하면 가난한 나라만 떠오르고 누군가 내 팔뚝을 만지작거릴 때 이상하게 그가 동지처럼 느껴져 자꾸 바뀌던 애인들의 변심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 멀리 떼 지어 가는 철새들 눈부시게 흰 아침 이 세계가 나를 추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 주하림 / 몬떼비데오 광장에서 (주하림,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비, 2013)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3.03 -
주하림 / 작별
주하림 / 작별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주하..
2020.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