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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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사라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녹색의 빈 가지가.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
2020.11.16 -
안미옥 / 질의응답
안미옥 / 질의응답 정면에서 찍은 거울 안에 아무도 없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 버티다가 울었던 완벽한 여름 어떤 기억력은 슬픈 것에만 작동한다 슬픔 같은 건 다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 어째서 침묵은 검고, 낮고 깊은 목소리일까 심해의 끝까지 가닿은 문 같다 아직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이 났다 안미옥 / 질의응답 (안미옥, 온, 창비, 2017) https://www.instagram.com/donkgrine/
2020.04.07 -
안현미 / 다뉴세문경
안현미 / 다뉴세문경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거울 밖엔 장미가 한창입니다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처럼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이곳을 빠져나가면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사랑에 빠져 버릴 수 있었던 초능력을 상실한 지 너무 오래 다시 장미는 피는데 나는 죽은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밤입니다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물냉면을 먹고 낙산 성곽 길을 내려오던 밤, 당신이 내게 건넨 다뉴세문경을 닮은 거울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에 대하여, 오랜 세월 ..
2020.04.03 -
정희안 /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
정희안 /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 우선 헐거워진 안구부터 조여야겠어 의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네모난 메모는 너무 반듯했어 느슨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떨림이잖아 사랑은 사탕 같은 것 길이와 깊이 중 어느 쪽이 좋을까 잠들지 않고 꿈을 꿀 순 없잖아 달리자는 남자와 달라지는 남자 수순은 잘못되었지만 수준은 비슷해 일용직 알바생의 심정을 너는 몰라 너는 내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해 우리 모두 갑질 아래 새로 태어나곤 하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간을 정리해버렸어 미움은 마음에서 출발해 머리는 항상 미리를 준비했어 망설임은 사치야 네가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처럼. 취업은 걱정 중 제일 으뜸이지 숲이 술을 대신할 순 없잖아 기능도 못 하면서 가능을 얘기했어 조직은 때로 조작도 해 유인하려면 유..
2020.03.14 -
최형심 / 파티에 맞는 얼굴을 팝니다
최형심 / 파티에 맞는 얼굴을 팝니다 턱 선이 날렵한 당신. 수술자국은 턱 안쪽에 있어 안전합니다. 1번 김태희 2번 황신혜 3번 송혜교… 2번을 선택한 당신. 2번 얼굴이 after와 before를 비교하며 거울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 것을 들여다봅니다. 꺼져있던 이마가 볼록, 주걱턱과 튀어나온 앞니는 사라졌습니다. 완벽한 황신혜입니다. 저절로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갑니다. 순간, 웃음까지 꿰매버린 의사를 어금니로 질근 씹어봅니다. 오늘밤 book party를 위해 차라리 1번 김태희가 될 걸 그랬다고 잠시 후회합니다. 가벼운 머리에 톱밥을 꾹꾹 채워 넣는 당신. 뽕으로 빈 머리를 채우는 일이 지겹다고 진저리를 칩니다. 그래도 파티에는 황신혜가 더 낫다고 위로합니다. 약간 유행이 지난 얼굴이지..
2020.03.01